블로그 이미지
- 꿈으로 매개된 착각의 장 속에서 - 네트로피를 녹이는 뜨거운 인식으로
생마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17. 6. 22. 23:31 단상

 중학생 시절의 주된 활동 중 하나는 피씨방에서 친구들과 게임하기였다. 구마을 상가에서 개포고등학교와 가장 가까운 피씨방의 이름이 네메시스였는데, 하루는 친구와 함께 그곳에서 게임을 하던 중 - 피씨방을 운영하던 노부부와 어느 청년 하나가 심하게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피씨방을 나오면서 친구에게 대체 무슨일로 실랑이가 벌어졌는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친구 왈 그 청년이 노부부에게 돈을 요구하더라는. 정확한 호칭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동네 양아치/조폭이라 부를 만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다음날에도 방과후 친구와 함께 네메시스 피씨방엘 갔는데 - 간판은 부서져 떨어져 있고, 철문에 붙은 자물쇠도 끊어져 있고 - 피씨방 내부의 모니터, 키보드, 책상, 의자 등등이 심하게 파손되어 어질러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전날 실랑이를 벌였던 양아치/조폭의 멤버들이 상납을 거부한 노부부의 가게에 보복을 가한 것이란 추론이 가능했다. 이후 네메시스란 명칭을 다시 접하게 된 건 고등학생 시절 잠시간 플레이 했던 울티마 온라인의 사설 서버 이름으로 접하게 됐을 때고, 네메시스가 복수와 응징의 여신이자 율법의 여신이라는 상세한 의미까지 알게 된 건 시간이 꽤나 지난 뒤의 일이다. 자연스레 따라온 궁금증 - 네메시스 피씨방을 운영하던 노부부는 그 양아치/조폭에게 네메시스의 힘을 빌어 복수와 응징을 할 수 있었을까?

 고시원에 살던 시절 불미스러운 일로 벌금을 낸 적이 있다. 상대가 먼저 내게 위해를 가한 건이었으므로 억울함이 컸으나, 사법적 주도권은 자의적/심정적 억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약식 명령 자체도 너무 억울해서 오히려 내가 정식 재판을 청구했음에도 불구하고 - 집안 덕에 무직이어도 먹고 살만 하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평소 다양한 소송 경험을 통해 증거 수집에도 능했던 상대방의 힘이 훨씬 강했다. 법률가들의 언어가 아닌 자의적/심정적 억울함을 토로하는 나의 언어는 그 냉엄함 앞에 씨알도 안 먹히는 게 어찌보면 당연. 형사/검사/판사가 나와 친한 동네 아는 형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이렇게, 이것의 나의 죗값이라면 온전히 받아들이겠다 마음먹은 뒤 앞선 사람들 처럼 판사님에게 벌금 액수를 깎아달라 구걸하지 않고 -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왔다. 나는 상대방의 자그마한 악행들까지 증거로 수집하며 살아가는 타입이 아니니까. 이후의 감정은 좀 복잡했다. 반성하고 겸허해지자는 마음 한켠으로, 오직 증거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과 무조건 맞고소를 해야만 일방적으로 바보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도 강하게 자리잡았다. 내가 소인배라 그렇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시간이 흘러 앞선 사건을 기억의 한켠으로 밀어넣고 일상으로 살던 와중,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횡단보도에서 나와 와이프를 칠 뻔한 노인과 시비가 붙었는데, 고성과 욕설이 오가던 중 노인이 내 얼굴에 침을 여러차례 뱉다가, 나중에는 차에서 내리며 등산용 스틱을 꺼내 내 배를 찌른 것이었다. 노인의 얼굴이 시뻘갰던 게 꼭 술을 마신 것 같기도 했고. 나로서는 이유불문 어떠한 형태의 폭력이든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화를 꾹 참고 그 노인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잡아두기 위해 상대방의 차 앞을 막아섰다가 - 차를 길 옆으로 대라고 창가 쪽으로 가서 이야기하는 순간 그 노인은 엑셀을 밟고 도망가버렸다. 경찰차가 온 건 신고 후 거의 30분이 되었을 쯤이었다. 차가 많이 막혔다고 했다.

 경찰서에 도착했으나 그 노인에 대한 신병확보, 음주측정, 블랙박스 압수는 커녕 아무런 조치는 없었다. 그냥 사무적으로 고소장만 접수되었을 뿐 그 노인은 그냥 그대로 가버린 후 아무렇지 않게 자기 볼일들을 보고 다닌 것이다(경찰관에게 그냥 나는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출석하겠다고 하고 도망다니면 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법률가가 아니라 상세히는 모르겠으나 - 아무래도 긴급하게 그 노인을 체포 해올 필요까진 없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첫 조사까지 그 노인이나 나에게나 며칠의 시간이 있었고, 당연하게도 내 증거는 나 스스로 찾아다녔다. 도로 CCTV가 없는 곳이라 근처 인형뽑기방 CCTV를 확인했고(카메라 대수는 물론이고 각도까지 매우 좋았다), 항상 같은 자리에 서계신 요구르트 아주머니는 목격자 - 이러이러한 증거가 있노라고 형사님께도 친절히 알려드렸다. 

 형사님 말로는 그 노인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데, 내게는 또 나만의 사정 - 사건을 목격한 와이프가 건강상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으므로 내가 남 사정 봐줄 처지는 아니었다. 형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블랙박스는 노인 본인이 없다고 잡아떼서 어쩔 수 없다고도 하고. 어쨌거나 검사님 보러 왔다갔다하는 시간과 그 노인에게 분노하는 정신적 품을 계속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노인과 단 1분 1초도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합의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이후 알아보니 주당 50~100 정도의 합의금으로 끝난다기에 상대가 노인이기도 하여 그냥 주당 50으로 2주 쳐서 합의금 100 정도를 바랐지만(내 입장에선 아량을 베푼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 합의 통화 도중 노인의 발언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정상 급하게 갈 곳이 있어서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긴 한데, 너 욕 엄청 잘하더라? 젊은 사람이 좋게좋게 넘어가야지 뭐 어쩌겠느냐?' 따위 이야기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겉잡을 수 없는 분노를 겨우겨우 가라앉히며 '합의금은 제가 알아보니까 주당 50에서 100 사이...' 말하던 도중 노인은 내 말을 끊으며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싸가지 없는 새끼.'를 연발하며 형사에게 내가 150을 요구했다는 헛소리까지 늘어놨다(물론 통화 내용은 전부 녹음해 두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형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그 노인이 나를 모욕죄로 고소했으므로 이제부터 나도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엔 어떻게 모욕죄를 빠져나갈까 이런저런 궁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공연성은 그렇다 치고 특정성 부분에서 빠져나가 볼까. 아니면 어차피 그 노인에게 증거나 증인이라고 있어봤자 실상 나도 심한 욕설들을 많이 들었으므로 모욕죄 추가 고소로 가면 그 노인의 자승자박 아닌가. 끝없는 고뇌와 분노가 나를 집어삼켰으나 - 누가 이기고 지는가를 떠나 옆에서 이 상황을 겪는 것 자체로 힘들 와이프를 위해 그냥 서로 소를 취하하기로 하면 그냥 좋게 마무리 되지 않겠느냐고 형사님께 먼저 연락드렸다. 내가 한 번 큰 아량으로 참고 넘어간다는 취지였다. 이제와서 다시 되돌아 보니, 그 노인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했을 나에 대한 맞고소는 그냥 내가 그대로 감수하고 끝까지 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최종적으로 내게 불리할 것은 없었으니. 하지만 당시에는 그 엄청난 분노 - 이 '화'라는 것이 내 몸을 갉아먹는 듯한 고통을 일상으로 끌고가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마지막 정리되는 모양새까지 내 입맞에 맞는 건 아니었다. 내가 꼭 그 노인에게 내 죄는 묻지 말아달라고 구걸하는 것 같은 절차까지 포함해야만(이 부분이 가장 크게 나를 괴롭혔고, 다시 그 노인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사실도 역겨웠다) - 절차가 끝나게 돼있었다. 찝찝함과 함께 다시 분노가 찾아왔다. 그러나 고맙게도 와이프가 잘 제어해 주었다. 분노와 증오를 먹고 사는 악귀의 유혹이라고. 악귀가 나를 계속 여기에 엮어서 분노와 증오를 쏟아내게 만드는 거라고. 

 네메시스는 별로 멋지고 힘있는 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와 응징의 여신이자 율법의 여신이라는데, 대체 율법을 통해 나쁜 사람을 응징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막말로 지나가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유없이 뺨을 맞아도 별로 쎄게 맞은 게 아닌데다 증거까지 없고, 더해서 때린 놈도 완전히 미친놈이라 비싼 변호사 선임해서 일방적으로 나를 바보로 만들려고 들면 진짜로 내가 바보가 될 수 있는 세상.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별로 심각해 보이는 사건이 아니면 뭐 그냥 귀찮고 자잘한 잡일일 뿐이라 - 대충 통밥 굴려서 상호 합의로 해결시키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 역시 네메시스는 나약하고 허술한 인간들이 떠올린 허상일 뿐인가. 얼굴에 침을 몇 차례나 뒤집어 쓰고, 배를 찔려 피멍이 들면서도 화를 꾹 참아 눌렀던 건 다름아닌 율법의 응징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는데 - 왜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시간적으로 나만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을까.

 내면의 분노는 계속해서 끓어올랐고, 나를 좀 추스리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나쁜 노인이 발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그 노인의 머리통을 백 번도 더 넘게 깨부수면서 눈알을 파내고 내장을 파내고 일가족을 불태우는 상상을 하며 - 내면에서 끊임없이 악을 발(發) 하는 - 심각한 발악의 상태에 처해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세상에 나 같은 소인배가 또 있을까 싶었다. 와이프에게 근처 절에 좀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 뒤 겨우 잠이 들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와이프가 기억하는 절이 있어 오늘 방문하였다. 참된 마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절인데, 시간이 늦어 문이 닫힌 듯했으나 - 혹시나 해서 눌러본 초인종을 듣고 나이드신 비구니께서 문을 열어주셨다. 불당에 가서 방석을 깔고 절을 시작했다. 

 아만(我慢)이다. 내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 노인의 작은 잘못에 그렇게 크게 분노했을까. 내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의 뉘우침을 바라고, 더 나아가 그 죗값까지 바랐을까. 정진하지 못했다. 번뇌의 일생, 세상을 향해 가시를 쏟아낸 만큼 그 가시가 다시 되돌아왔을 뿐이다. 더럽고 깨끗함이 어디있는가. 더하고 덜함이 어디있는가. 그 노인이 사실은 부처님이 아닐까. 나의 아만을 꾸짖고, 자비로움을 일깨워줄 부처님이 아닐까.

 끊임없이 절하다 보니 눈과 입으로 계속 땀이 흘러들어오고, 침과 콧물까지 방석을 적시고 있었다. 어느샌가 몸이 불편하신 보살 한 분이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초와 향을 올리셨고, 삼배 후 떠나가실 때에 비구니께서 문을 닫을 때가 되었다고 알려주셨다. 발등의 피부가 까졌고, 가랑이가 살짝 후들거렸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참 개운했다.

 세속이 어떻고 율법이 어떻고 정의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 창창한 나이의 젊은이 아닌가. 아만으로 가시를 쏟아내기 보다는 스스로의 정진을 우선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를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악한 기운이 최대한 나를 피해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일 경찰서에 가서, 그 마지막 화해의 자리에서 부처님께 인사 올리면 화답해 주시리라 믿는다.

 결과적으로 네메시스는 내게 필요한 신이 아니었다. 내가 당했던 건 나의 아만이 자초한 악이었으므로 애초에 네메시스가 응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선한 흐름에 보태야 할 힘을 소인배적인 자기만족에 허비하지 않기를. 어제도, 오늘도 - 누가 봐도 경악을 금치 못할 심각하고 악랄한 사건이 어딘가에선 발생했을 것이다. 네메시스는 그 이름으로 - 율법을 통한 복수와 응징으로 - 억울한 피해자들을 돕고 있으리라 믿는다. 과거 네메시스 피씨방을 운영하던 그 노부부도 네메시스의 은총을 입었으리라 믿는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부림2  (0) 2017.11.16
몸부림  (0) 2017.11.16
스캐빈저  (0) 2017.05.21
삼사재2  (0) 2017.04.25
개발자의 깊이  (0) 2017.02.17
posted by 생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