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길. 지하철에선 눈 감고 쉬었다. 마침 그동안 지하철에서 조금씩 펼쳐보던 책을 수요일에 뗀 상황인데, 거 타이밍 참 희한하게 들어맞았지. 계단은 처음으로 옥상까지 올라갔다가 한 바퀴 돌고 사무실로. 다들 가볍게 인사 나눈 뒤 업무 진행. 최 사원님은 오후 반차셔서 오전까지만 하다 가셨고, 사무실에는 모두 6명 - 김 부장님과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네. 업무에 제대로 집중이 될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놀지도 않았고. 적절히 시간을 배분해서 썼다. 문 과장님이 나중에 헷갈리시지 않도록 내가 손댔던 부분들은 완전히 끝을 내서 SVN에 올려두었다. 마지막 선물 삼아 개발 툴에 없던 기능을 하나 추가할까 했는데, 이미 5시 반을 넘은 상태여서 생각을 접어버렸다(최악을 가정했을 땐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 점심은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과 사무실에 있던 컵라면으로 해결. 대표님과는 모두 함께 옥상에서 담배 피우며 마지막 인사 나누었고. 소장님, 김 부장님, 김 차장님, 염 대리님과는 퇴근할 때 차례로 인사 나누었다. 퇴근 직전 청소는 그냥 가볍게 쓰레기/재활용 치우는 선에서 끝났다. 생각 외로 무덤덤했던 날.
업무일지 시즌2는 아무래도 여기에서 마무리를 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시즌1에 다니던 G사를 박차고 나와 3개월 조금 넘는 기간 동안 - 예상치 못했던 우여곡절들을 겪었네. 돈, 인간관계, 배움, 성장의 기회 등 여러 요소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G사는 퇴사하기 직전의 내 입장에선 편안한 인간관계 말고는 더이상 얻을 게 없었다. 올초에 잠시 다녔던 M사는 성장의 기회와 배움이 매우 컸으나(기술 적용 권한이 있으니 자발적 배움의 의지가 샘솟더라), 상식 밖의 인간관계과 인력구성에 크게 실망했고. 마지막 A사에서는 네 가지 모두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지만, 성장의 기회가 정치적(?)으로 막혀버렸다. 배움의 측면에서도 IAP 붙이기나 특정 플랫폼에 업로드하기 같은 선험적 껍데기 지식 이상의 핵심 노하우가 보이지 않아 많이 아쉬웠고. 그렇다고 내가 권한을 쟁취하기 위해 너무 도전적으로 나가기에는 - 인간관계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심정. 음. 예전 G사의 우 과장님, 인간적으로 얼마나 멋진 분이셨던가. 겉으로는 무뚝뚝한 듯하지만 업무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아랫사람 배려해 줄 거, 보호해 줄 거 다 해주시고. 당연히 회사 프로젝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분이시고. 하지만 업무적으로는 대단히 보수적이셔서 나로서는 성장 속도나 배움의 방향, 새로운 프로젝트의 가능성 등 사방이 막혀있는 벽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문 과장님이 그간 못 본 사이에 우 과장님 처럼 업무적으로 보수화 되어있을 거란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왔는데 - 과장으로 진급 되시기 이전 문 대리님이었을 때의 그 치열함이나 도전정신이 조금 시들어있었다(물론 인간적으로는 내가 알던 좋은 분 그대로였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생각보다 빠르게 공무원식 업무태도에 적응해갈 때 쯤 이런 권고사직 이벤트가 벌어진 게 천만다행. 잘 된 일이다. 커리어 측면에서 3년차면 이제 시작 단계지만, 나이는 그렇게 적게만 볼 나이가 아니잖나.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능력을 펼쳐보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상위 퍼센티지에 위치하는 훌륭한 프로그래머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별로인 사람들이 어떻게 별로였는지도 분명히 봤기 때문에 뭐 그렇게 크게 자학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실력이라는 요소를 놓고 봤을 때 - 모멘텀이 언제 찾아올지, 내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길은 없는 것이고. 먹고살자고 하는 일 - 돈이야 과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가성비 있는 정도면 충분히 오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관계나 회사의 안정성은 운이 꽤 크게 작용하는 것 같고. 배움은 남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아나가야 한다는 문 과장님의 충고. 결국 성장의 기회 - 이것은 입사하기 전에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