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2의 순환경제
과거의 유산
디아블로2는 출시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게임이지만,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가지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해 큰 규모의 온라인 컨텐츠 패치를 시도한 첫 MO로서(지금껏 확인해본 바로는) 다시 살펴볼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효과적인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데에 성공한 게임으로 평가할 만하다. 디아블로2의 순환경제에 적용된 방법론들은 MO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 적용시키기에도 크게 무리가 가지는 않을 기초적인 것들이라고 보며(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경제적 이슈로 골머리를 앓는 최근의 게임들이 과거의 지혜를 빌리는 데에 간단한 참고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경제적 이슈라고 하여 거창하게 전문적인 개념이나 용어를 파고들기 보다는 게이머가 재화의 흐름을 어떻게 체험하고 느꼈는가에 초점을 맞춰 간략하게 3개의 기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기는 디아블로2 오리지널을, 2기는 확장팩 파괴의 군주 출시 이후를, 3기는 래더 패치 이후를 뜻한다. 이러한 기수별 구분은 경제적 이슈 뿐만 아니라 디아블로2의 거시적 컨텐츠 변화 흐름을 관통하는 구분이라고 생각하며, 경제적 이슈는 기본적으로 플레이 과정에서 발생되므로 기수별 플레이 양상의 변화와 함께 언급해볼 생각이다.
1기의 경제 – 물물교환
디아블로2가 출시된 2000년은 가상 재화의 현금거래 이슈(이에 얽힌 원조교제 이슈까지 있었다)에 대한 찬반논란과 도덕적 성토 등이 대두되던 시점이었으며 인기 있는 멀티플레이 게임들 대부분이 이에 엮여있었다. 디아블로2도 이러한 게임 외부적인 이슈들로부터 격리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여기서는 게임 내부적인 측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로 한다.
1기의 경제는 거래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방에서 만나 물물교환을 하는 매우 간단한 형태였는데, 좋은 옵션을 가진 아이템이 주된 물물교환 대상이었으며 골드는 공용화폐로 인정받지 못했다. 간혹 겜블(복불복 아이템 뽑기)을 주로 즐기는 사람들이 대량의 골드를 구하려는 경우는 있었으나 전체적인 거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골드가 게이머들의 거래에서 공용화폐로 기능하지 못하고 철저히 부수적인 요소로 전락한 채 물물교환 위주의 경제가 발생된 게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물물교환을 기초이자 핵심 속성으로 만든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골드를 쌓아두기 어렵게 만들어둔 점이다. 캐릭터가 지니는 소지금과 창고에 넣어두는 저장금에는 상한선이 있었는데, 레벨에 비례한 상한선이므로 1레벨 캐릭터를 여러 개 만들어 골드를 저장하려는 시도는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며 캐릭터 사망시에 경험치 및 아이템 내구도는 물론 골드가 큰 폭으로 차감되는 등 사망 페널티까지 컸으므로(로그라이크로 불리우는) 시스템적으로 골드의 축적에 한계를 둔 상태였다.
둘째는 골드를 벌기 쉽고, 쓰기 쉽게 만들어둔 점이다. 골드를 벌기 위해 사냥 중에 떨어지는 아이템만 꼬박꼬박 내다 팔아도 100만 단위의 골드를 버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에 비해 골드를 소비하는 수리/잡화구입/용병부활/겜블 등의 행위는 수시로 발생되었다. 어차피 게이머들의 거래에서 공용화폐로서의 이점도 없었기에 남아도는 골드는 겜블로 소비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셋째는 사냥 전리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은 점이다. 캐릭터 셋팅에는 아이템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디아블로 시리즈의 큰 특징으로 꼽히는 무작위 아이템은 필연적으로 확률에 깊게 연관된다. 당연히 자기가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자기가 사냥한 결과로 얻어낼 확률이 낮았으며,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서로의 전리품을 비교/대조하며 각자의 필요에 맞게 교환하는 거래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직접 얻든, 거래로 맞춰나가든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사냥 전리품을 찾아 다녀야 할 이유가 주입된 것이다.
넷째는 거래 정보가 파편화 돼있었다는 점이다. 게임 내부적으로 적절한 시세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없었으므로 커뮤니티 게시판 등이 수단화 되었지만 역시나 모든 게이머들이 커뮤니티 게시판을 활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시세를 모르고 좋은 아이템을 그보다 훨씬 낮은 아이템과 교환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일각에서 대안화폐로 활용하기 시작한 조던링(강력한 성능의 반지 아이템)은 거듭되는 복사 파동을 겪으며 급격하게 추락해버렸다(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위상이 예전만 못했다). 파편적으로 제시되는 대안화폐가 공용화폐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거래 정보의 중앙집중화가 필수적이라고 봤을 때, 게이머들이 평균적으로 판단할 근거(거래 정보)들이 모이지 못하고 적절한 상대와 적절한 아이템을 만나기 위한 운과 판단력이 보다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물물교환 경제의 미덕이 강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네 가지 요소들이 맞물린 결과 축적과 소지가 용이하지 않았고, 희소성마저 낮았던 골드는 공용화폐로서 기능하지 못하며 철저하게 외면 받았다. 동시에 앞서 언급한대로 게이머들 각자의 사냥 필요성(플레이 동기)은 상승했는데, 비교적 최근(2012년) 발매된 디아블로3는 디아블로2에서 거래 정보가 모이지 못했던 불편함을 해소하고 골드를 공용화폐로 만들기 위해 게임 내부적으로 경매장을 도입하는 등 물물교환 경제를 배격하였으나 이는 급격한 골드 인플레이션(화폐가치의 하락과 물가상승)을 가져옴과 동시에 게이머들이 사냥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사냥할 필요 없이 경매장만 검색하면 필요로 하는 모든 아이템이 올라와 있으므로)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점은 충분히 눈여겨볼 만하다. 이에 더해 콘솔판 디아블로3는 게이머들의 거래가 활발히 일어나기 쉽지 않은 플랫폼 기반이므로 자기가 사용할 아이템을 자기가 얻어내기 유리하도록 확률을 설정해둔 점도 확인해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1기의 경제는 물물교환 그 자체로서 불편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디아블로2의 핵심적인 재미를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앞서 말한 디아블로3의 경매장이 워낙 명확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블리자드는 2014년 3월에 경매장을 전면 폐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전개될 상황은 결과가 어떻든 흥미로운 관전 요소가 될 것이다.
2기의 경제 – 수집활동
거듭되는 아이템 복사 파동과 밸런스 조절 미숙 및 원활하지 못한 서버 상태 등으로 적지 않은 숫자의 게이머들이 1기 오리지널 시절에 디아블로2를 떠났지만, 2001년 발매된 확장팩은 긍정적인 변화들을 담고 있었다. 800 * 600 해상도가 추가되고, 어쌔신과 드루이드 캐릭터가 추가되는 등 큼지막한 변화들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영향을 줬던 요소들은 일견 쉽게 보이기 쉬운 점진적인 개선과 추가였는데, 거시적인 컨텐츠의 변화로 보자면 아이템 선택지 강화와 개성의 다양화로 요약할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정말로 긍정적인 변화들이었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아이템 등급의 추가를 보자. 디아블로2의 아이템 체계를 극단적으로 축약하자면 종류/등급/희귀도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노멀 등급과 익셉셔널 등급 다음으로 엘리트 등급이 생기면서 2층 구조가 3층 구조로 확장됐다. 예를 들어 익셉셔널 등급의 가죽모자 기본 방어력이 45~53이라면 엘리트 등급의 가죽모자 기본 방어력은 98~141인 셈인데, 그만큼 요구치(레벨/힘/민첩)도 높아질 뿐더러 옵션의 질에 따라 낮은 등급의 아이템이 더 효율적인 경우도 있었으므로 게이머들에게 높은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엘리트 등급 갑옷의 높은 힘 요구치를 만족시켜 높은 방어력을 누리기 보다는 적당한 방어력에 머물고 그만큼 힘에 덜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등급도 물론 중요한 요소지만 등급 이외에 아이템 종류별 외형/내구도/최대소켓/무게/사거리/속도적합성 등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둘째로 세트 아이템의 강화를 보자. 익셉셔널 등급의 세트 아이템들이 추가된 것에 더해 세트 아이템을 모두 모으지 않고 두 개 혹은 세 개만 모아 착용해도 그에 해당하는 일부 효과가 발생되도록 수정했는데, 안젤릭 세트의 반지와 목걸이의 예를 보자. 이것들은 확장팩에서 추가된 익셉셔널 등급의 세트 아이템도 아니고 그저 발견하는 족족 바닥에 버리거나 상점에 팔던 별볼일 없는 극초반용 아이템들이었으나 이 반지와 목걸이를 동시에 착용하면 레벨에 비례해 적중률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일부 효과를 볼 수 있었는데, 상당한 자원을 갖춘 게이머들도 당장의 대안이 없다면 유용하게 사용하던 강력한 효과였다. 이렇게 모두 모아 완성 효과를 노리지 않고 낱개 그 자체의 특징적인 효과 혹은 강력한 일부 효과를 활용하는 것이 유효해지면서 아이템 선택지 강화에 더해 개성의 다양화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셋째로 룬, 주얼, 참의 추가를 보자. 룬과 주얼은 기존의 보석과 비슷하게 아이템의 소켓에 박아 넣어 그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룬은 총 33종류로 다양한 개성을 가졌으며 주얼은 희귀도에 따른 무작위 옵션을 가졌다. 참은 소지품으로 그저 들고 있기만 해도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부적이다. 아이템의 소켓에 어떤 룬이나 주얼을 박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아이템으로 탈바꿈 될 정도로 단순한 부가요소 이상의 강력한 옵션들을 가졌으며 덕분에 1기에서 사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소켓 아이템의 가치도 덩달아 재발견되었다. 특정 룬들을 순서에 따라 적합한 종류의 소켓 아이템에 박아 넣으면 매우 강력한 아이템이 탄생하는 룬워드 시스템의 추가는 소켓 아이템의 재발견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참 또한 어떤 참 위주로 소지한 캐릭터인가에 따라 캐릭터의 개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요소였다.
넷째로 크래프트 아이템의 등장을 보자. 호라드릭 큐브는 디아블로2를 플레이 해본 게이머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특수한 아이템 조합기인데, 특정 조합법을 실행함으로서 특정 옵션을 가진 아이템을 얻어낼 수 있는 보다 체계적인 조합법이 크래프트 아이템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옵션이 없는 아이템에 옵션을 부여해줬던 임뷰, 원하는 아이템에 소켓을 뚫어주거나 이름을 새겨주는 퀘스트에 비해 게이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이템을 사냥 전리품이 아닌 제작 결과로서 얻어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위의 네 가지 외에 유니크 아이템에 각각의 레벨 제한을 걸어둔 점이나 무기 스와핑 기능을 추가한 점 등도 플레이 양상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러한 컨텐츠 변화의 흐름에 따라 괜찮은 옵션을 가진 아이템과 조던링을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전부였던 경제활동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바로 전략적인 수집활동이 필요해진 것이다. 게이머들은 33종류의 룬 중에서 얻기 어려운 상위 룬이나 좋은 옵션의 주얼 및 참을 얻기 위해 어려운 난이도의 사냥터에 도전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세밀히 살피며 상자나 바위 등의 환경 오브젝트들도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주얼 및 참은 환경 오브젝트에서 얻을 확률이 비교적 높았다). 상위 룬과 좋은 옵션을 가진 참이 대안화폐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좋은 옵션을 가진 주얼의 가격이 생각 이상으로 비싸게 거래되기 시작했으므로 더 이상 몬스터만 많이 죽인다고 능사는 아니게 된 것이다. 더불어 쓸만한 세트 아이템은 물론이거니와 발견하기 어려운 엘리트 등급의 일반 아이템까지 임뷰용으로 보관하는 등 다양해진 거래 품목에 맞춰가기 위한 다양한 수집활동은 확실히 2기의 경제를 양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저마다 아이템 위주로, 혹은 룬이나 주얼 위주로 모으는 등 게이머들의 수집활동에 개성이 가미됐던 점이나 크래프트 아이템으로 호라드릭 큐브의 효용성이 재발견된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마치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의 원시적 형태에서 벗어나 조개나 이빨, 진주 등을 수집해 정기적인 거래에 대응하며 가내수공업을 발달시킨 먼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라도 하듯 말이다.
3기의 경제 – 순환경제
2기의 변화는 긍정적이었지만, 변화된 그대로 다시 단조롭게 반복되기 시작한 컨텐츠는 디아블로2를 떠나려는 게이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수백 번 반복해서 보스를 쓰러뜨려봐야 쓸만한 아이템을 얻는 일은 극소수였고, 수집활동을 통해 화폐로 사용될 만큼 가치있는 룬이나 참 등을 얻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블리자드는 디아블로2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단행했다. 다양해진 2기의 플레이 양상을 토대로 순환경제의 시동을 걸기 위한 래더 패치(1.10 패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다시 거시적 컨텐츠 변화의 흐름을 만들며 3기 순환경제의 시작을 알린 중요 요소들을 짚어보자.
첫째는 래더 시스템을 추가한 점이다. 래더는 시즌별로 리셋되는 순위 기반의 월드이며 모든 게이머들은 래더 월드에 입장하기 위해 캐릭터를 새로 만들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래더 월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니크 아이템 및 이용할 수 있는 호라드릭 큐브 조합법이 매우 강력했기에 대다수 게이머들이 시즌 한정적인 래더 캐릭터를 큰 거부감 없이 처음부터 키우기 시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크게 보자면 리셋 룸 기반(게임에 재접속하면 맵 지형이나 몬스터 배치가 매번 달라지는)에서 리셋 서버 기반(캐릭터까지 새로 만들어야 하는)으로 개념이 확장된 시즌제 게임이 된 것이다. ‘맨땅에서 시작한다’는 용어가 커뮤니티에 널리 퍼졌으며 다같이 ‘맨땅에서 시작하는’ 재미는 디아블로2 게이머들에게 신선하면서도 강력한 재미로 다가왔다.
둘째는 스킬 시너지 시스템을 추가한 점이다. 외면 받기 쉬웠던 스킬을 쓸모 있게 살려내기 위해 관련 스킬끼리 시너지로 엮어버린 것인데, 예를 들자면 파이어볼트에 포인트를 투자하면 파이어볼트 그 자체가 강해지는 것은 물론, 상위 스킬인 파이어볼에도 보너스가 생기고, 파이어볼에 포인트를 투자해도 하위 스킬인 파이어볼트에 보너스가 생기는 시스템으로서 포인트 투자만 신경 써서 해주면 활용도가 낮았던 하위 스킬도 주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캐릭터들의 개성을 큰 폭으로 다양화 시켰던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이후 많은 게임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셋째는 아이템의 종류를 큰 폭으로 넓힌 점이다. 많은 숫자의 유니크 아이템을 추가하였으며, 래더에서만 얻을 수 있는 다양하고 강력한 룬워드 아이템은 똑 같이 양 손에 칼을 들고 휠윈드를 도는 바바리안 캐릭터라도 무기 조합은 천차만별로 가져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넷째는 월드 이벤트를 추가한 점이다. 꼭 화폐로 활용하지는 않더라도 조던링의 옵션은 매우 뛰어났으므로 복사된 조던링의 숫자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블리자드는 조던링을 대량으로 상점에 판매하면 나타나는 우버 디아블로를 만들었고, 이 우버 디아블로로부터 유니크 참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해당 월드 이벤트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재미를 본 블리자드는 1.11 판데모니움 패치를 통해 우버 보스들을 대거 등장시켰고, 이 우버 보스들을 만나러 가기 위한 키 아이템들이 수집의 대상이 되는 등 월드 이벤트는 디아블로2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우버 보스들을 수월하게 쓰러뜨리기 위한 캐릭터 셋팅은 커뮤니티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마지막은 호라드릭 큐브를 강화한 점이다. 기존의 크래프트 아이템 조합법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했음은 물론이고 하위 룬을 상위 룬으로 높일 수 있는 조합을 마련하거나 유니크 아이템의 등급 변화에 더해 소켓을 뚫는 방법까지 열어주는 등 그 기능을 매우 강력하게 만들었다. 2기의 호라드릭 큐브가 가능성을 발견하는 정도에 그쳤었다면, 3기의 호라드릭 큐브는 하위 컨텐츠 부터 엔드 컨텐츠까지 게이머들에게 확실한 파트너로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모범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만한 순환경제를 만들어냈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순환경제란 거의 모든 자원이 버려지는 일 없이 골고루 이용되며 화폐(골드 이외 대안화폐들 포함)의 인플레이션이 억제되고, 상위 게이머와 하위 게이머의 경제활동이 윈윈(WIN-WIN)으로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개념을 뜻한다.
일단 호라드릭 큐브로 아이템을 튜닝하는 등의 엔드 컨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하위 컨텐츠에서 얻을 수 있는 하위 재료들이 일정 부분 필요했고, 하위 게이머들은 이 하위 재료들을 모아 엔드 컨텐츠를 즐기는 상위 게이머들이 가진 화폐(특정 룬 혹은 참)와 교환할 수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중간층의 게이머들이 중급 룬들을 상급 룬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최하위 보석을 찾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었던 등 꽤 오밀조밀한 구조였다. 엔드 컨텐츠에 필요한 자원들 중에는 대안화폐(룬)가 들어가는 경우도 잦았으므로 대안화폐가 인플레이션을 겪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기본적으로 얻기 어려운 것들이었던 이유도 크다) 시즌별 래더 리셋이 이에 방점을 찍었다. 몇 가지 안 되었던 대안화폐 중에서도 특히 비싸게 거래되었던 특정 옵션의 참을 얻어보려 하위 게이머들도 눈에 불을 켜고 수집활동을 하기 시작했었으며, 이렇게 상위 게이머가 가진 화폐가 하위 게이머에게 이전되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래더 월드가 아닌 일반 월드는 큰 비중이 없는 자기만족용 테스트 월드로 기능하였으므로 일반 월드에서의 복사나 인플레이션이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룬워드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재료(소켓 아이템)가 필요했는데 이 적절한 재료는 아이템 찾기 확률이 높은 캐릭터가 어려운 난이도의 사냥터에서 사냥한다고 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재료를 얻을 기회는 하위 게이머에게도 공평하였으며 이것들은 매우 비싼 물품들이었으므로 상위 게이머의 자원이 하위 게이머에게 큰 폭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상당히 열려있었던 셈이다. 최상급 아이템의 종류나 조합법을 늘리는 양적인 증가로 상위 게이머의 자원 소모활동을 촉진시키는 것이 하위 게이머의 자원 형성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물물교환과 수집활동이 순환경제의 틀 아래에서 활기차게 돌아갔던 데에는 특히 캐릭터 셋팅의 자유도가 높았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스킬 시너지 시스템을 통해 주력 스킬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데, 실질적으로 무엇을 주력 스킬로 삼느냐가 바로 캐릭터의 개성 그 자체였으며 - 이러한 스킬 선택의 폭 증가가 다양한 아이템들이 골고루 애용될 수 있는 든든한 기반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덕분에 앞서 짚어본 아이템 종류의 양적인 증가가 상호작용의 강화로 직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교적 최근 발매된 디아블로3의 스킬 공격력이 모두 무기 공격력 기반의 계산식임을 살펴보자. 디아블로2에서는 마법 공격력 위주의 캐릭터라면 스킬 자체적인 독립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공격력이 낮은 무기더라도 스킬 레벨과 캐스팅 속도를 높여주는 무기를 선택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것에 비해(무기 공격력 기반의 계산식이 아니었으므로) 디아블로3에서는 마법이든 물리든 무조건 무기 공격력이 강해야 스킬 공격력도 올라갈 뿐더러 무기 종류와 직업 사이의 속도적합성도 없는 상태이므로 모든 클래스가 한손 무기로는 울려퍼지는 분노(최대 공격력이 가장 높다)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푸른 서슬과 같이 개성은 있지만 최대 공격력이 낮은 무기는 그대로 죽은 자원으로서 경제활동의 경직도를 높여버리는 것이다.
물론 디아블로2의 3기가 완벽했다는 뜻은 아니다. 봇의 폐해는 실로 엄청났으며, 사전지식이나 충분한 인내 없이 처음 시작하는 게이머가 순환경제에 편입되기는 쉽지 않았다. 개성있는 아이템들이 워낙 강력해서 밸런스를 손상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3기 후반부에 등장한 면죄의 징표라는 스킬/스탯을 리셋시켜주는 소모품 역시 재료 수집 및 거래와 조합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는 점은 디아블로2가 컨텐츠를 양적으로 늘려 추가하는 일과 질적인 상호작용을 유도하는 일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을 뒷받침 해준다.
온고지신
지금까지 살펴본 디아블로2의 순환경제를 보며 들 수 있는 의문 - 과연 과거의 제약된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난 듯한 경제구조를 최근의 MO 혹은 MMO에도 완결구조로서 도입할 수 있겠느냐는 점은 충분히 고민해볼 만하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아직까지 성실하게 순환경제를 추진했던 게임은 손에 꼽힐 만큼 드물 뿐더러 그저 의문부호를 달고 있는 상태일 뿐 불가능으로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이라는 사자성어에 기대어 보자면 - 요즈음 수많은 멀티플레이 게임들이 아이템 부가요소를 적당한 옵션을 가진 보석 위주로 단조롭게 디자인하는 점에 비해 강력한 옵션을 가진 보석, 룬, 주얼, 참 등으로 아이템 선택지 강화와 개성의 다양화를 노렸던 디아블로2의 시도들은 상당히 대담했다고 평할 수 있다. 앞서 디아블로2와 비교하며 몇 번 언급했던 디아블로3가 전작인 디아블로2에 비해 오히려 얕아진 아이템의 깊이(아이템의 제반 요소들이 터무니없이 간소화된)를 드러낸 점은 두고두고 의문이다. MMO인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이하 와우)에 확장팩 마다 새로 추가되는 최상급 아이템들이 선택지 강화의 영역이 아닌 철저한 업그레이드 강요의 영역에 위치했음을 떠올려본다면 완결지향적(디아블로2)인 구조와 미완결지향적(와우)인 구조의 장단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쉽지만 이것은 디아블로3를 와우처럼 미완결지향적으로 여러 번의 확장팩을 발매하는 타이틀로 끌고 가기 위함으로 읽힌다. 다행히 디아블로3와 와우 모두 헬게이트에서 처음 도입했던 특정 옵션 변경 시스템이나 아이온에서 처음 도입했던 형상 변환 시스템 등을 차용하거나 차용하려 시도중인 점 등을 본다면 서로간의 정반합을 지향하며 한정된 자원의 활용 방안을 찾으려 나름의 노력은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최근 디아블로3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래더 시스템의 도입 관련 설문을 진행했던 것을 보면 많은 게이머들 못잖게 블리자드 또한 디아블로2의 유산을 다시금 되짚어보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과연 현재진행형인 디아블로3의 거시적 컨텐츠 변화 흐름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이와 더불어 2013년 현재 시즌별 리셋 월드를 기반으로 개발중인 문명 온라인과 울프 나이츠 - 두 MMO의 경제적 이슈 또한 흥미롭게 지켜볼 만하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마인크래프트가 세계적으로 모든 연령층에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무래도 한정된 자원으로 수많은 조합을 만들어내는 조합의 자유(지형 포함)가 있었던 영향이 아닌가 싶다(게다가 멀티플레이까지 가능하다). 싱글플레이 게임이 멀티플레이 게임 보다는, 그리고 멀티플레이 게임 중에서도 MO가 MMO 보다는 자유도의 범위 설정 및 순환경제를 지향하기 쉽다고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만 - 이미 같은 필드를 여럿이 공유하고 있더라도 필요에 따라 서로의 행위를 다르게 얽히게 만드는 방법(와우)과 상위 게이머가 하위 컨텐츠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길드워2) 등이 이미 나와있는 실정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과거의 유산들을 활용하여 완결구조 순환경제의 꽃을 피우는 게임들이 많이 등장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는 많은 결과들이 도전 당시에는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운 상황에 - 혁신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던진(?) 결과임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시작 초기에 공용화폐의 인플레이션이 당연한 듯 일어나며 상위 게이머들의 배타적인 경제권이 형성되는 작업장 친화적인 게임에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는 게이머들이다.
※예전에 썼던 글을 토대로 2013년 가을에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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