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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으로 매개된 착각의 장 속에서 - 네트로피를 녹이는 뜨거운 인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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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24.11.16 바람기억 2
  2. 2021.05.10 아르바이트 - H 호텔 편
  3. 2021.05.10 아르바이트 - 크라제버거 편
  4. 2018.12.02 신사의 품격
  5. 2018.11.25 아르바이트 - 하이드어웨이 편
  6. 2018.05.15 나의 살던 고향은
  7. 2018.05.15 카네이션
  8. 2018.02.18 허생과 변 씨도 아니고
  9. 2017.10.05 잃어버린 맛
  10. 2017.04.05 아르바이트 - 코리아태틀러 편
  11. 2017.01.22 두부 심부름
  12. 2016.06.20 좌절
  13. 2015.11.21 고시원
  14. 2015.09.28 남산골 한옥마을
2024. 11. 16. 02:45 회고

 코엑스에 갈 일이 있을 때 삼성역 말고 봉은사역이란 훌륭한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 탄천과 가까운 이 봉은사역은 - 내가 한창 삼성역 근방에서 자주 놀던 때, 양재천을 끼고 살던 시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원랜 없었던 역이다. 탄천은 양재천의 물줄기를 이어받으며 삼성동/대치동/개포동/일원동/수서동 등과 맞닿아있다. 과거 친우들이 모두 양재천과 탄천 생활권에 살고 있었고 평소에 천변을 따라 걷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기에 - 그랬기에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그 지점의 아름다움을 나는 알고 있었다. 탄천을 가로질러 잠실 쪽으로 건너갈 때나, 코엑스 쪽으로 건너올 때나 - 적절하게 부는 바람과 물내음은 어김없었고 - 따스하고 나른한 오후에 '봉은교' 아래에서 그냥 그 근방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물론 좋아했지만, 특히 다리 위에서 탄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물줄기가 노을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커피숍. 최근 붙여진 도로명 주소로는 '봉은사로'라 명명된 거리의 커피숍. 사실 '봉은교'도 지도를 찾아봤기에 아는 명칭이지 사실 평소 내 머릿속엔 그냥 '탄천 끝 그 다리'로 입력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 거리 또한 그냥 '그 거리' - 그럼에도 '그냥 그 거리'라고만 언급하기엔 아쉬운,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봉은사로에 있는 커피숍의 야외 테이블에서 - 커다란 가로수 낙엽(플라타너스 잎)을 굴리는 쌀쌀한 가을바람이 내 몸의 모든 감각을 통해 각인됐던 아름다운 경험 덕분이다. 따듯한 커피와 함께여서 더 그랬을까 - 쌀쌀하지만 날카롭진 않았던 그 가을바람과, 다시 언급하게 되는 '구르는 낙엽'의 시각적 효과까지 꽤 감각적인 요소들이 겹쳤던 것 같다. 도심의 밀집된 빌딩숲에서 벗어나는, 작은 도로를 통해 천변으로 나오는 일종의 과정이자 틈새 같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이 거리는 - 빌딩숲과도, 한강과도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 탁트인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과 그에 수반되는 강바람이 자아내는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주 정도 전이었을까. 오랜만에 코엑스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기억 속 봉은사로의 그 커피숍을 찾아갔다. 내가 기억하는, 봉은교와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야외 테이블도 있었던 그 커피숍은 없어진 듯했고 대신 근처에 스타벅스가 영업중이었다. 하지만 스타벅스는 그 특유의 획일화된 익스테리어/인테리어로 점철되어 있었고, 당연히 야외 테이블도 없었다. 따듯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실내 테이블에 앉을 수는 있었지만, 바로 그 거리에서 느끼고 싶었던 그 가을 풍취를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하기야, 예전 그 때가 대체 언제적인가 - 똑같은 커피숍이 어떻게 아직까지 그대로 영업중이겠나. 시간에 따라 무엇이든 풍화되는 법. 봉은교에서 한강 방향으로 바라보는 탄천 끝 풍경은 여전히 보기 좋았지만, 타이밍이 조금 일렀기에 노을까지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봉은교 다리 위에서 탄천 내음 물씬한 바람은 마음껏 맞아볼 수 있었다. 그바람에 마음의 흔들림도 있었다. 덕분에 실망스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다음번엔 건너편에 있는 커피숍들 중에 야외 테이블을 보유한 곳도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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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21. 5. 10. 15:32 회고/아르바이트

크라제버거를 관둔 뒤 곧바로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하다가 면접 보고 나가기 시작한 H 호텔의 스파와 라운지 관리 업무. 꼭대기 층에 스파와 마사지실이 함께 있고, 나선형 계단을 타고 한 층 올라가면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는 구조였다.

출근 첫날에 매니저와 인사한 후 선임자를 따라다니며 따뜻한 물 틀어놓는 시간 등등 스파 셋팅 업무를 먼저 익혔고 이후 화장실 휴지를 세모로 접어놓는 법이라던가 화장대 셋팅하는 법, 신발 정리하는 법 등등을 추가로 배웠다. 그간 경험해왔던 업무들에 비하면 노동 강도는 확실히 낮은 곳인데다 고급 인테리어가 주는 안락함과 탁 트인 창밖 경치도 좋아서 크게 기대되는 업장이었다. 우리는 스태프 방에 모여있다가 일이 있으면 잠시 나와서 일을 보고 다시 들어가는 형태인데, 처음 본 다른 분들도 모두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확실히 스태프들끼리의 친근감이라는 게 있어서 하루만에 정들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

하지만 큰 기대는 순식간에 큰 실망으로 이어졌다. 보통 셋팅을 다 끝내놓고 나면 다음 셋팅 확인 시간이 아니고선 클레임이 들어올 때 불려나가거나, 여성 마사지사들은 마사지 요청하는 손님이 있을 때 불려나가는데 - 하나같이 되돌아 올 때의 표정이 아주 어둡고 슬픈 표정들이 아닌가. 사연을 깨닫는 데에는 딱히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H 호텔에 와서 이러한 시설들을 주기적으로 즐길 정도가 되는 사람들이면 어느정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있을 터 - 온갖 희한한 갑질은 물론이고 남에게 말 못할 마사지실에서의 사정들. 스태프들끼리 끈끈한 유대로 뭉치는 건 어찌보면 정신줄 붙잡고 살아가기 위한 감정의 연대였을지도. 점점 열이 받아가던 시점에 나이로는 두어살 어렸던 동생이 자꾸 자기에게만 클레임을 거는 사람이 있다며 이따 불려나가면 같이 가서 봐달라고 - 드디어(?) 갑질의 현장을 직접 볼 기회가 생겼는데, 가서 보니 엄마가 차려준 회사에서 해외 유명 IP 비슷하게 베낀 걸로 잘나가던 모 회사 대표가 특유의 찌질성을 뽐내면서 새로 세탁돼서 나온 가운을 붙잡고 여기서 나는 냄새가 구리네 어쩌네 - 내가 맡아보니 그냥 모텔 가운 냄새 같던데, 호텔 가운은 향수 뿌려서 나와야 되나? 물론 신사적이고 깔끔한 손님들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이 온 것에 관심 가지며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한 손님들도 있었으나 - 혹시 내가 희한한 갑질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혈기왕성하여 끓는 피가 증발할 정도라는 걸 스스로도 느끼던 시절인데, 혹시라도 손님 명치를 발로 깐다거나 멱살 잡고 캐비닛에다 밀치는 사건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매니저에게 잘 이야기하고 마무리. 출근 첫 날이, 마지막 근무 날이 돼버렸다.

기억에 남는 건 화장실이 매우매우 아늑하고 조용한데다 창 밖으로 경치까지 좋았던 것이고,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이슈는 당시 현역이었던 맨유의 박지성 선수가 H 호텔에 왔다는 것. 모두 박지성이 온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우리가 곁에서 알게 될 그의 사생활을 지켜주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마침 박지성 선수가 신발장으로 처음 올 때 입구 쪽에 있다가 묵례도 주고받았는데, 어디가서든 계속 자랑할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가 스파에 입장할 때에 어디선가 덜렁거리는 소리가 나서 우연히 보게 된 - 월드클래스.

posted by 생마
2021. 5. 10. 14:40 회고/아르바이트

내가 가진 아르바이트 경력은 모두 짧은 기간이지만, 그럼에도 그 기간 뇌리에 박힌 짤막한 인상들은 여전히 - 완전하진 않아도 상당 부분 유효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크라제버거는 지금은 없어진 수제버거 프랜차이즈로, 수제버거 시장 개척으로는 국내 선발주자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20대 중반에 접어들고 양재천 다리 건너 타워팰리스 쪽 상가에 들어온 매장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당연히 업무는 일반적으로 하는 레스토랑의 온갖 잡일들 - 테이블 셋팅과 테이블 치우기, 서빙과 설거지는 기본 - 여기에 추가로 맥주 컵에 맥주 따르기와 에이드 만들기를 새로 겪어보았다. 에이드 만들기는 그냥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만들면 되니 크게 별스러울 게 없었으나, 내심 손님이 마시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낸다는 재미는 느꼈던 것 같다. 한 번은 손님이 맥주 컵 두 개의 거품 양이 다르고 자기 컵에만 거품이 꺼지면서 양이 줄어 보인다며 클레임을 걸어온 일이 있었다. 그래서 대뜸 '양이 부족하시면 리필해드리겠다'고 대응했다가 윗사람에게 나중에 주의를 들었던 기억 - 정말로 맥주 리필해주기 시작하면 우리 가게 거덜난다고. 당시에는 젊음의 패기인지 아니면 무대뽀인지 - '거품 좀 꺼진 거 가지고 호들갑이냐 또 줄테니 그만 징징대라'라는 마인드도 솔직히 있었다. 그 외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발달장애인이 두 명 정도 껴서 함께 일하는(주로 쓰레기 비우기), 나름 인력이 꽤 있는 매장이었는데 다들 발달장애인에게 너무 못되게 굴던 것. 수제버거는 내가 만들 일도 없었고, 솔직히 맛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매장 특유의 이미지도 기억에 남는 게 없고, 특징적인 냄새도 없었다. 사람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 없네.

안그래도 아르바이트란 그냥 잠시 거쳐갈 뿐인 예비적 사회 경험이란 의식을 가졌던 때인데 - 실제로 나가 일을 해보면 고생한 것에 한참 못미치는 시급이 주어질 뿐이었으므로 - 특별한 매력이나 동기부여가 없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애초에 못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경제관념이라도 똑바로 가지고 있었다면 - 20대 초중반에 어설프게 대학생 행세하며 아르바이트 하고 다닐 게 아니라 - 군대 먼저 빨리 다녀온 뒤에 괜찮은 공장에라도 들어갔거나 혹은 군대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했을지도 모를 일. 여하간 지금보다 더 정신 못차리던 시절에, 여전히 한 달 내 카드값 몇 십 만원 정도는 집에도 아무 무리 없는 줄 알고 그저 노는 걸 더 좋아하던 때의 경험들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나이만 조금 더 먹었을 뿐, 놀기 좋아하는 습성은 그대로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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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8. 12. 2. 12:49 회고

 한창 '젠하이드어웨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일이다. 동남아 출신 웨이트리스가 한 명 있었는데, 캔디라는 예명을 사용했었다. 본명은 '어오이'였는지, '어외이'였는지 - 중간 정도의 애매한 발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직원들 식사 시간이 되면 본국에서(?) 가져온 반찬 같은 걸 꺼내서 같이 먹곤 했었고, 가끔씩 내가 자기 남자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꺼내던 아가씨였다.

 하루는 캔디가 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며 일이 끝난 뒤 이태원에서 보자고 했는데, 당시는 혈기왕성한 총각 때라 - 아무래도 캔디가 드디어 쭉쭉빵빵미녀를 소개해 주려는가 보다, 큰 기대를 안고 이태원으로 출발. 일단 캔디와 먼저 만난 후 그 친구를 기다리는데, 우리더러 먼저 식당에 가있으라는 연락이 온 모양이라 나와 캔디가 먼저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식당으로 입장 - 동남아 미녀의 호리호리한 체질을 베이스로 가졌으면서도 실루엣이 과감하게 호리병 형태로 떨어지는 타고난 골반과 초콜릿 피부 - 는 개뿔, 웬 서양인 할아버지 두 분이 우리 테이블로 와서 앉으려는 것이 아닌가. 이 분들의 머리카락 색깔이 확실하게 기억나진 는데 - 어쨌든 한 분은 풍채가 좀 있으신 분이셨고(큰 할아버지) - 한 분은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쓰신, 콧수염 할아버지셨다(콧수염 할아버지). 두 분 모두 최소 만 55세 이상으로 보였고, 첫 인상은 넉넉하고 여유로운 인상.

 뻘쭘하게 시작된 식사 시간. 캔디의 본국 음식을 전문적으로 하는 식당이었고, 캔디는 이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매우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대화를 들어 보니 반찬 같은 것도 여기에서 받는 모양. 고기를 쌈에 싸먹는 음식이었는데, 큰 할아버지가 내가 먹는 모습을 보더니 건강해 보여서 좋다고 - 마치 우리 친할아버지가 손주 보듯이 대해주셨다. 내가 이분들에게 Sir 라는 경어를 붙였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콧수염 할아버지는 자기 소개를 길게 하지 않으셨고, 큰 할아버지는 자기를 모 대기업에서 인터넷 전화 사업을 진행중인, 맨체스터 출신의 영국 사람이라고 소개하셨다. 요즘에야 070 인터넷 전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 전화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 때였으니 - 초창기에 와서 사업을 진행중이셨던 듯. 영국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어보시길래, 나 맨체스터 정말 좋아한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다(박지성표 맨유빠) - 라고 했는데 의외로 표정이 안좋아지셔서 의아했었다. 맨체스터 사람들 모두가 맨 팬은 아니고, 오히려 맨유를 극도로 싫어하는 맨체스터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안 건 한참 뒤의 일이다(스포츠는 화합의 장이면서 또 분열의 장이기도 하다).

 식사 자리가 끝난 뒤 캔디는 어딘가 볼일이 있어 다녀와야 한다며 휙 가버렸고, 나는 할아버지 두 분이 함께 놀자고 붙잡으셔서 근처에 있는 바에서 2차 시작. 당구대가 있는 바였는데, 내 구력이 워낙 낮은 터라 제대로 된 접대를 해드릴 수는 없었다. 큰 할아버지가 계속 자신있게 치라고 북돋워 주셨던 기억이 난다. 여차저차 예기치 못했던 만남은 3차까지 계속되어 - 영국 신사 두 분과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 큰 할아버지가 '이 근처에 진짜 좋은 곳이 있다, 거기엔 좋은 음악들이 모두 있다'고 소개한 바에 가게 되었다. 아마 단골이셨던 듯, 바에 들어서면서 음악을 찾자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곧바로 손님 방향으로 셋팅된 모니터와 스피커, 마우스가 있는 자리로 안내해 주셨고 - 거기에 나란히 셋이 앉았다. 뒤이어 시작된 광란의 시간. 사실 나는 영국 신사분들과 음악 세대 및 장르가 달라 완전히 동화되어 놀지는 못했다. 똑똑히 기억나는 건, 이 분들이 퀸의 'Don't Stop Me Now'에 맞춰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며 고래고래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장면. 마치 전세낸 바의 주인공인 것처럼 - 그냥 미치지 못해 상또라이(죄송하지만) 처럼 개미친 벌건 얼굴로 - 마치 내가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말달리자'를 고래고래 외치다 목이 쉬어버리는 것처럼. 최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이슈라던데 - 내게 퀸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바로 이 영국 신사들과의 만남, 이 장면이다.

 콧수염 할아버지는 3차까지 한 뒤 먼저 집에 가셨고, 나는 큰 할아버지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며 붙잡으셔서(모든 비용들 다 내주시고 집에 초대까지) - 어느샌가 다시 합류한 캔디와 함께 택시에 올라타 한남동 언덕에 있던 큰 할아버지의 거처 - 커다란 빌라에 들어서게 되었다. 길다란 직사각형 구조였는데 현관문에서 몇 발짝 걸으면 왼쪽에 샤워실, 그 옆의 손님용(?) 방에 묵게 되었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너무너무 궁금한 나머지 손님용 방 침대 옆에 있던 옷장 문을 열어봤는데 - 스쿠버다이빙 장비들이 들어있었다. 나도 자신만의 레저 활동 하나쯤 가지고 건강하게 나이들어서, 큰 할아버지 처럼 즐거운 노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쳤는데, 어디에도 수건이 안 보여서 잠깐 고생했었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작별하기 위해 침대 위 침구류 정리를 각 잡아 깔끔하게 해두고 레스토랑으로 출근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친구들과 가끔씩 가던 바 - 은마아파트 사거리에서 한티역으로 꺾은 뒤 몇 블럭 가다가 다시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있던 복층 바 - 영어 선생님이라던 영국 남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대화 나누다 보니 나이도 비슷한 듯하여 친구와 함께 그 영국인에게 우리 브라더 아니냐고 했는데 - 갑자기 정색하면서 절대로, 끝까지 우리는 브라더 아니라던 그 사람. 글쎄, 우리가 미국식 힙합 문화를 너무 자주 학습한 나머지 - 다함께 브로 브로 하면서 노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잘못이었을까. 그와는 반대로 아무 격의 없이 내게 기억에 남을 금요일 혹은 토요일을 선물해 주셨던 영국 신사 - 큰 할아버지가 겹쳐 떠오르더라는. 사전적 의미로 신사란 - 예절과 신의를 갖춘 교양있는 남성, 상류사회의 남성이라고 한다. 그 지긋하신 연세로 모 대기업에 모셔져 왔으면 - 굳이 부류를 나누자면 상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좆도 없이 그저 새파랗기만 하던 나를 손님으로 생각하고 대해주셨던 예의, 자기 집에까지 초대해 하룻밤 묵게 해주신 신의. 더해서 당구, 음악, 스쿠버다이빙으로 표현된 교양까지. 그 분은 말 그대로 영국에서 오신 신사였다. 오히려 구력이 낮고 퀸도 제대로 몰랐던 내가 교양을 못 갖춘 상태였지. 요새도 정정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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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8. 11. 25. 14:12 회고/아르바이트

 20대 초반, 용인에 있는 태권도장에서 사범으로 일하던 때다. 네 가족이 주공아파트 2단지 단칸방에서 - 그 좁디좁은 곳에 각자의 이불을 깔고 - 인간 테트리스 하듯 머리와 다리를 끼워맞춰 잠을 자던 때였는데, 그래도 코미디언 김신영 씨처럼 자다가 얼굴에 빗방울 맞을 일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때 나름 많이 힘들긴 했었던지 좋지 않은 생각까지 해보기도 했었고, 바로 그 다음날 새 통장을 만들어 보기도 했었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의 소개로 당시 압구정동에 있던 한 레스토랑 - '젠하이드어웨이'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 월화수목은 태권도장, 금토일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휴일 없는 투잡의 시작이었다.

 레스토랑 일은 처음이었는데, 할일이 꽤 많았다. 아침에 출근해 매장 전체 바닥을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으로 시작 - 식기비품 관리, 테이블 셋팅, 주문 받기, 음식 나르기, 중간중간 화장실 청소와 정원 관리, 유리 닦기, 화분, 어항 등등. 건물은 레스토랑 전용이었는데, 너무너무 예뻤었다. 원래는 미용실이 입점했던 건물이라 얼핏 들었는데 - 구조가 'ㅁ' 자로 되어 가운데 공간이 뚫려있고, 그 가운데 공간에 아름다운 정원과 새장이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복층 구조여서 2층에서 1층의 정원을 내려다 보는 것도 1층 자체를 즐기는 것만큼 좋았다. 사장님이 모 유명 의류 브랜드도 함께 운영하시던 분이어서 매장의 각종 테이블이나 인테리어 등에도 아낌없이 투자하셨고(여유가 있으시니), 또 인력 규모나 매장 운영(장비나 비품 등등)에도 아낌없이 투자하셨고 - 덕분에 귀에 무전 이어폰을 끼고 매니저 님의 지시를 받으면서, 아무리 바빠도 순서 있게 일할 수 있었다. 당시 매니저 님은 숏컷과 정장 콤보의 멋진 여성분이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만나본 상사들 중 손꼽을 정도로 유능한 분이셨다. 

 어쨌든 지어진 건물 자체와 인테리어/익스테리어(아웃테리어)는 물론이고 테이블이나 식기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미려하다 보니 나도 덩달아 최선을 다해 일하게 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 매장을 내가 계속 깨끗하게, 아름답게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심리였을까. 테이블 셋팅도 제대로 각 맞춰서 메뉴얼대로 - 테이블 위에 종이를 놓는 위치, 그릇의 각도, 나이프의 방향과 각도 등등. 한창 힘 좋을 때여서 창문도 잘 닦았고, 무거운 그릇이나 짐도 잘 날랐다(그릇들이 꽤 무거운 것들이었다). 특히 여자 화장실 바닥은 - 사람들이 쓰고 버린 핸드타올을 활용해서 - 지저분하게 물기가 튀어있지 않고 깨끗하게 바싹 말라있는 화장실 바닥을 유지하려 노력했었다. 어찌보면 정말 낮은 일, 더러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매장의 격은 올라갔으리라(사진 찍는 사람들도 참 많이 다녀갔었다)돈 많이 줄테니 다시 그때처럼 열심히 일하라고 하면 아마 못 할 듯싶다. 그만큼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었고, 당시 시급으로 원래는 매월 4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받았어야 했는데 - 실제 통장에는 50만 원이 들어왔었다(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 레스토랑의 철학 자체도 퀄리티 높은 서비스를 사람들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누리다 갔으면 좋겠다는 철학. 이는 사장님의 의류 브랜드에도 적용되어 있는 철학인 듯 - 실상 올 여름 그 브랜드의 신소재 옷(가격도 합리적인)이 아니었다면 땀에 절은 티셔츠로 매일 고생했을 것이다.

 이것저것 배우기도 많이 배웠었다. 당시 셰프는 사장님의 지원으로 다른 나라에 음식 견학도 다니셨었고, 동남아에서 온 요리사들도 있었다(아시아 퓨전 푸드였다). 직원들과 매출을 나누고 사기를 북돋우는 법도 생생하게 목격했고. 테이블이나 장식품 등등 진짜 좋은 걸 얻으려면 세계 곳곳을 많이 둘러보고 그만큼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도 어깨너머로 배웠고. 식기는 절대 물기가 묻은 상태로 두지 않고 하나하나 린넨으로 닦아서 - 절대 물방울 자국 없는 식기로 만든 뒤에야 손님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다. 스팀기에서 나온 와인잔을 린넨을 이용해 맨손 접촉 없이 - 최종적으론 진짜 아무런 자국(당연히 물방울 자국도) 없이 깔끔하게 닦아 걸이에 걸어놓는 법도 배웠고(손이 빨라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손님이 시야에 있다면 테이블을 치울 때 음식을 마구 잡탕으로 섞어 치우지 않도록 주의. 덕분에 다른 레스토랑에 가서 서비스를 받다 보면 이 매장이 가격 대비 어느정도의 서비스를 하고 있는지 꽤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돈 많은 동네라고 그럴싸하게 매장 꾸민 뒤 가격 높게 잡아놨는데 - 숟가락에는 물방울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직원들이 저들끼리 낄낄거리다 커피잔에 커피 질질 흘려서 내오고 있으면 - 뭐라고 하진 않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창 일하던 때 - 웨이터는 Waiter라 가만히 서서 손님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기다리다가 - 1층 정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창 속 햇살을 틈틈이 쳐다보면 시나브로 밀려오기 시작하는 피로.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정원 안으로, 마치 매장 이름(Hideaway) 처럼 도망쳐 잠 자고 싶다고. 매장에 울려퍼지는 잔잔한 음악들까지 어찌나 잠을 부추기던지. 하지만 그 음악들 중 - 갑자기 이게 뭔가 싶게 빠르고 힘찬 템포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음악이 하나 있었다. 맨처음 'A~ boy~'로 시작하는 가사. 마치 유리창에 비친 나를 지칭하는 듯 - 하지만 이후 가사는 'went back to Napoli~ because he missed the scenery~'여서 어찌보면 나와는 상관 없는 이탈리아의 나폴리로 뜬금없이 튀어버림에도 - 이 음악을 너무너무 좋아한 나머지, 최소한 전생의 내 이야기였을 거라 굳건히 믿고 머릿속으로 가사 하나하나 따라부르기 시작. 이 템포에 맞춰 일하면 정말 힘든 기분 하나 없이 즐겁기만 했었다. 바로 Sophia Loren의 'Mambo Italiano'다. 역시나 요즘에도 종종 듣곤 하는데, 덕분에 버킷리스트에 관련 항목까지 하나 생겨났다. 바로 '이탈리아 나폴리의 경치 좋은 테라스에서 Mambo Italiano를 들으며 맛있게 피자 먹기'이다. 물론 그저 환상으로만 남겨둬야 할 부분일 수도 있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2시간 넘게 줄서야 들어갈 수 있는 레스토랑 - 기껏 들어갔더니 동양인들만 모아놓는 반지하 테이블에서 다른 사람들과 합석 - 팁 달라고 징징대는 웨이터/웨이트리스의 불친절과 마주해야 하는 - 그렇다고 하더라는 냉정한 현실이 이탈리아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러가지 에피소드들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모 (여)배우가 손님으로 왔던 일. 보통 나는 앉을 때 의자를 빼주는 서비스까지는 해드리지 않았는데, 이 배우의 표정에는 '쓸쓸함'이 짙게 묻어있었다. 해서 앉을 때와 일어설 때 모두 의자까지 빼드렸고, 배우도 여기에 고마움을 표시했었다. 나중에 남편과의 이혼 이슈가 터졌을 때, 나는 누구 잘못인지 곧바로 나름의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혹자는 말한다. 바람 피운 사람 잘못 아니냐고.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많이 외로웠었고, 그건 남편 잘못이다. 남편이 할 도리를 다 했는데도 바람을 피웠다면 그때는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길게 일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던 즈음 - 매장 창고 근방에 와인 창고를 따로 짓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유는 몸이 너무 힘들어서. 휴일 없이 월화수목은 용인까지 출퇴근하는 태권도장, 금토일은 또 정신없이 몸 써야 하는 레스토랑이니 - 그 체력 좋은 20대 초반에도 더는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귀가 후 틈만 나면 쓰러져 자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레스토랑에선 정직원으로 일하라고 계속 이야기 했었는데, 나로서는 - 어찌보면 조금은 도제식이기도 했던 태권도장의 일을 휙 관둘 수가 없는 상태였다. 특정 시기 이후부턴 관장님이 돈을 전혀 받지 않고 계속 나를 지도해 주셨었으니, 나로서도 최소 일정 기간 일을 지속하는 게 도리였다. 투잡으로 받은 돈을 총 합산하면 대략 130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사범 일만 주 5일 했다면 대략 88만 원이 나왔을 테니 - 실로 88만 원 세대였다.

 몇 달 전 어머니가 모델 수업을 모두 마치고 수료식 겸 패션쇼를 하신 일이 있었다. 가장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 자신의 가치와 가능성을 탐색해보는 어머니를 응원하면서 - 근처의 레스토랑을 알아보다가, 예전에 내가 일했던 '젠하이드어웨이'가 떠올라 오랜만에 찾아봤으나 - 아쉽게도 더이상 영업하지 않는, 없어진 가게가 돼버렸다고 한다. 그러게, 압구정 상권은 죽어도 너무 죽어버렸다. 갈수록 상인들이 버티기 힘들어지고, 갈수록 청년층의 소득이 줄어든 이명박근혜 치세 속에 압구정동의 불빛이 유지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서 먹었던 음식은 게로 만든 가라아게에 커리를 부은 음식으로 기억하는데, 가끔씩 맛보고 싶은 음식 하나가 이렇게 '잃어버린 맛' 목록에 추가됐네. 제주도에도 매장이 하나 있다는데, 가보고 싶어진다. 아마 그곳도 하나의 도피처 처럼, 편안하고 미려하게 꾸며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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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8. 5. 15. 21:04 회고/개포동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 아버지가 어딘가에 심취한 듯 가끔 한 번씩 부르시던 노래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특별히 열과 성을 다해서 가르쳐 주셨던 시, 노래.

 위 가사들을 읊다 보면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긴 한데 - 부모님, 삼촌 세대의 향수에 감정이입이 될 것도 같은데 - 온전히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던 노래들. 왜냐하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었기에 무슨 과수원길 같은 것도 없었고, 넓은 벌도 아니었고. 물론 내가 태어나기 몇 십년 전만 해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카시아꽃이 사방을 뒤덮었을 - 그리고 넓은 벌이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 강남구 개포동 아파트 단지가 바로 나의 살던 고향. 갓난아이 땐 사당동에 잠시 있었고, 이후 시골 조부모님 손에 맡겨졌다가 처음으로 개포동으로 이사와 살기 시작했던 게 만 세 살 때. 이후 20년 넘게 개포동에서만 살았으니 고향이란 말 외엔 달리 가리킬 말이 없다.

 주공아파트 1단지 부터 4단지까지 넓게 펼쳐진 5층 짜리 시멘트 건물들. 동호수 써놓은 숫자 말곤 겉으로 보기에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던 똑같은 건물들. 1단지와 4단지는 2, 3단지와 다르게 땅도 더 넓고 세대도 많아서 단지 전체를 제대로 돌아보려면 걷다가 지칠 정도였지. 고층 건물들인 5~7단지도 꽤 걸어다녀야 했다. 개포동에 오래 살기도 살았거니와, 3단지에서 시작해 4단지, 1단지, 2단지를 모두 살아봤던 덕에 각 단지 어디어디에 개구멍이 있는지, 각 공원들의 샛길이 어디로 통하는지까지 다 외우고 있었다. 대모산과 구룡산의 산길도 모두 꿰고 있었고 말이다. 이런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가 구역, 근린공원 감성으로 자란 세대가 이제는 사회의 일원이 되어 고향을 노래할 때가 되었는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 혹시 시멘트 건물들이 멋이 없어서 그런 건지 - 딱히 기억할 만한 노래는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아무래도 멀리 길을 나서야 당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고향이 아닌, 아파트 공화국인 대한민국 서울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지않아 옛날 아파트 단지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가 정말 나올지도 모르겠다. 재건축 공사라는 게 개포동을 뒤덮기 시작했으니, 뭐 이미 재건축이 완료된 잠실 주공아파트 단지의 친구들은 벌써 고향의 풍경이란 걸 싹 잃어버린 상태가 아닌가. 나도 더 늦기 전에 다시 한 번 개포동에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다가도 딱히 가볼 일이 없다 보니 - 이미 여기저기 부수고 파헤쳤을 그곳. 언젠가 분명 다시 가볼 일이 생기겠지만, 일단은 고향의 풍경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들을 하나씩 기록해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한편으론 변화된 시대상 때문에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테헤란로 북쪽과 남쪽의 계급/의식이 다르더라며 생겨난 테북/테남이란 용어와 같은 맥락으로 - 양재천 북쪽과 남쪽도 그렇더라는 양북/양남이란 용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내가 성장하던 때만 해도 적어도 아이들끼리는 개포동 5단지냐 1단지냐를 구분하지도 않았었고, 대치동이냐 개포동이냐를 구분하지도 않았었다. 다들 누가 조금 더 부유한지 아닌지는 눈치껏 알았다고 하더라도 함께 어울릴 때 딱히 서로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누군가에게 배운 일도 없었거니와 스스로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등학교 3학년 때 쯤엔 타워팰리스에 사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같은 타워팰리스에 사는 아이들만 모아서 어울리도록 강제했던 일은 있었지만 그건 이미 머리가 많이 컸을 때의 일이라 딱히 상처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 한두 해 지났을 때였을까, 서클 후배들에게 듣기론 나 때와는 다르게 대치동 친구들이 개포동 친구들과 잘 놀지 않기 시작했다고. 양북/양남은 비교적 얌전한 용어고 - 요새는 주공아파트 사는 거지라고 주거, 임대아파트 사는 거지라고 임거, 빌라에 사는 거지라고 빌거 - 이런 메스꺼운 용어들을 아이들끼리 스스럼없이 만들어 사용한다고 한다. 나에게는 고향의, 추억의, 그리움의 대상인 주공아파트일지 몰라도 - 불과 몇 년 차이로 -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운, 상처뿐인 주공아파트일지도 모를 일이네.

 내 고향에서 자란, 자라고 있는 친구들이 거 참 별일 아닌 것에 주눅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부끄러움이 얼굴을 덮쳐오고, 상처가 되는 말들이 가슴을 찔러와도 얼른 정신차리고 회복했으면 좋겠다. 작은 가슴에 갇히지 않게 열심히 대모산/구룡산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양재천변을 뛰어다녔으면 좋겠다. 고향 산천에서 받은 기운으로, 우리가 뭘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면 되잖나. 물론 이런 순수한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나름 찌질함을 자랑하던 동창생이 - 자기 페이스북에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몇 평 안 되는 작은 아파트라고 재건축 대상 아파트 내부 사진 올려놓은 거 보면서 - 지금 그게 10억 20억 나가는 거 보면서 - 고향 산천에서 받았던 기운들이 다시 내 몸에서 싹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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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8. 5. 15. 14:32 회고

 매년 어버이날 전후로 카네이션을 보게 되면 - 볼 때마다 조건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은 아니지만, 어느 틈에선가 연기가 새어나오듯 새 나오는 기억들이 있다. 막아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지, 2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학교 어디선가 담배를 피우다 걸리는 바람에(딱히 문제아는 아니었는데) 동네 친구와 함께 봉사활동 처분을 받은 상태. 봄 기운이 충만했던 봉사활동 당일 친구와 함께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들고 버스를 갈아타며 어딘가 외진 동네의 다세대 주택 같은 곳을 찾아갔었다. 일종의 복지원이라고 하면 맞을까 - 지적장애인들이 생활하는 곳이었고, 다른 학교에서도 봉사활동을 왔는지 평소에 보지 못했던 교복을 입은 남녀 또래들도 꽤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적장애인들과 짝을 이뤄 카네이션을 만드는 것 - 플라스틱과 쇠로 된 재료들을 만지작거리며 옆에 앉은 장애인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었다. 얼굴로 보자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정신연령은 7살 혹은 8살 정도였다. 내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대꾸도 잘 해줬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너는 착해서 좋다'고 말하던 그녀. 옛날 자기에게 잘 대해줬던 누군가의 이름을 꺼내면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다시 찾아와줬으면 좋겠다고. 목소리 저편 찢어지고 부서진 듯한 마음 울음이 느껴졌었다. 육체적 연령과 정신적 연령의 불일치 진단 이후 서서히 구분지어지다 결국 어딘가로 격리까지 된 채, 이유 모를 노동의 반복으로 입에 겨우 풀칠하면서 - 누군가 와서 못되게 굴면 구는대로, 잘 대해주면 대해주는대로 투박한 손과 복잡하게 얽은 마음으로 탄생시킨 이 카네이션 - 구매하는 사람들은 분명 자기 부모의 가슴에 이것을 달아드릴텐데, 여기 장애인들도 가끔씩 부모의 얼굴이라도 보면서 살아가는 중인지 어떤지. 봉사활동을 끝내고 확인 받고 나오는 길에 복지원 원장의 얼굴을 봤는데, 확실히 '찌들어있다'는 인상이 얼굴 자체에 새겨져있었다.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쨌거나 복지원을 운영한다는 것이 어찌 평안하고 쉬운 일일 수 있을까.

 봉사활동 당일 함께 갔던 친구는, 안타깝게도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제 막 활활 타오르기 시작할 때인 20대 초반에.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약해 심장 수술을 했던 터라, 튼튼하게 자라라고 부모님이 이름자에 '鐵' 자를 넣어 개명까지 해주셨다던데. 고등학생 시절 내내 오토바이가 그렇게 좋았는지 오토바이를 사고 싶다고, 심심찮게 친구들 오토바이 이것저것 빌려서 타고. 피씨방에서 게임할 때 라그나로크 아이디도 '오토부릉'이라 짓길래 미친놈이라고 놀렸었는데. 20대가 되어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결국 구입한 오토바이(주변 친구들이 다 말렸었는데) - 왜 그렇게까지 달려야 했는지 그 심정을 알 것도 같지만 - 어쨌거나 너무 빨리, 너무 멀리 가버렸다. 장례를 치르고 몇 주 뒤, 하릴없이 얼굴이나 보자던 친구와 놀이터 그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때였다. 조금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 상가 앞에서 - 처절하게, 차마 어떻다고 표현 못 할 만큼 처절하게 -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던 친구네 아버님과 그 가족들이 보였었다. 그 부모의 마음이란.

 어버이날 전후로 카네이션을 보게 되면, 그리고 그게 가화(假花)라면. 부모님께 감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 - 어딘가 무거운, 복잡한 마음이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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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8. 2. 18. 21:24 회고

 이번 구정 연휴를 보내면서는 옛날 생각이 조금 났다. 한창 사업하겠다고 붕 떠 돌아다녔던 20대 중반엔 무슨 명절 때만 되면 각계각층의 인맥들에게 인사 돌리겠답시고 하루종일 휴대폰에 입력된 연락처들을 눈이 빠져라 쳐다보며 인사 문구를 끄적이곤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무슨 사업을 시작한 입장도 아닌데 쓸데없이 힘 빼고 시간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해 모두 정리해둔 상태. 창업아카데미 시절 모 강사님이 해주신 말씀도 있고 - 내 주변에 대단한 사람 누구누구가 있다고 팔고 다니지 말라 - 자기는 허접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꼴 밖에 안 된다고(당시 크게 느낀 바가 있어 그 뒤로는 절대로 어느 누구도 팔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선택을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인맥관리는 그냥 스타일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맥의 거점 역할을 하시는 분들은 지금의 나처럼 그쪽 방면에 열정을 걷어버린 사람들의 부족분을 메워줄 수 있는 소중한 분들이 아닌가. 단지 열정적으로 여기저기 연락을 돌렸던 과거의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다(월급쟁이가 속편한 부분이 많다).

 열정? 열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좀 미쳤던 것 같기도 하고. 순수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옥션을 이베이에 엑싯하신 이금룡 회장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과거 트위터 기록엔 2011년 10월로 돼있네. 회장님(이 호칭을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한다)의 강연을 듣고 난 후 받았던 명함 속 이메일에다 계속해서 만남 요청을 드린 끝에 약속을 잡을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전날 밤부터 버무리기 시작한 걱정과 기대(투자 요청)를 함께 가지고 갔던 상황. 나보다 앞서 왔던 사람은 손에다 회장님께 드릴 커피라도 한 잔 사왔었는데, 나는 그냥 맨손으로 들어갔었지. 대화 시작 전 내 테이블 앞에 놓인 건 차가운 물 한 잔이었는데, 돌이켜 보니 어쩐지 그게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파란약이었던 것 같기도(정신차려 - 현실이야). 어쨌거나 내가 그날 밤(?) 남겼던 기록을 보면 나는 회장님을 영감님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 영감님이나 나나 모두 단도직입적 스타일이었고, 나는 내 사업 아이템을 열심히 설명드렸었다. 영감님은 사업 아이템에는 상당히 긍정적이셨지만, 시드머니 투자 요청은 단호히 거절하셨다. 낭만시대가 아니니 열악하게라도 팀을 모아서 먼저 시작해 보는 게 순서라고. 열악하게 먼저 해보기조차 힘듭니다 - 시드머니 받아봐야 금방 없어지니 니 사람 만드는 순서를 먼저 거쳐라 - 네, 알겠습니다. 가만 돌이켜 보면, 맞는 말씀이면서 또 틀린 말씀이다. 먼저 시작해야 되는 건 순서상 맞는 말씀인데, 흙수저라 아무 여력도 없는 고시원 거주자에게 하실 말씀으론 좀 틀린 말씀이기도(그런 현실마저 씹어먹을 만큼의 역량이 내게 없었던 걸까). 물론 섭섭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귀한 시간 내어서 벌거숭이에게 사업 컨설팅 해주시는 회장님 같은 분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나. 기록상에도 '내 음성에 내포된 뜻을 영감님의 뇌 주름 속으로 한 번 루프시킨 후 결과값을 다시 내 귓속으로 가져올 수 있었으니 100% 내가 이익'이라고 씌여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감사해 했다는 이야기다. 입장 바꿔 내가 회장님이었어도 - 언제 봤다고 면전에서 돈 내놓으라고 - 이런 유형의 인간들을 가장 조심했을 것 같다. 무슨 허생과 변 씨도 아니고 말이다. 기억하다 보면 이래저래 웃음짓게 된다.

 이제는 매트릭스의 파란약을 너무 많이 집어먹은 상태인 듯하다. 결혼했으니 홀몸도 아니고 - 와이프는 나와 180도 다르게 - 애살있게 자기 몫 잘 챙기는 현실적 타입이라 행여라도 다시 빨간약을 집어먹고 정신이 몽롱해진 나를 발견하면 '여보 왜 그래요 어서 그 약을 뱉어내요'라고 내 명치를 쎄게 때릴 것 같은데. 이쯤 와서 보면 - 허생도 참 미친 놈이고, 변 씨도 참 미친 놈이다. 그래서 허생전이 재미있는 풍자 소설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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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7. 10. 5. 23:10 회고

 100세를 눈앞에 두고 작년에 노환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 - 물론 그때는 일제시대였으니 초등학교니, 중학교니 하는 요즘의 명칭과는 달랐겠지만 - 초등학교 졸업 때 수석 선물로 받은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까지 먼 거리를 통학하셨다고 한다. 어느 겨울날 - 모두들 풍족치 못하게 살아가던 때라 배가 한껏 곯아있던 상태에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외할아버지가 그만 탈진 상태로 자전거와 함께 눈밭에 쓰러지셨다고 한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어느 일본인이 쓰러진 외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 간호해 준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그 때 그 일본인이 내왔던 - 양배추가 들어간 미소된장국의 맛을 잊을 수 없다고, 다시 맛보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 대체 얼마나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진(목숨까지 결부된) 맛일지 나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내게는 이정도로 강렬하게 점착된 맛의 사연은 없지만, 그래도 2017년 추석 명절을 보내다 보니 - 내가 잃어버린 맛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신데, 외할아버지가 함경도 흥남 출신이셔서 함경도 음식도 익히신 분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여건상 외할머니의 음식은 맛 볼 기회가 거의 없었고, 특이할 만한 가자미식해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셋째 이모가 만드신 걸 맛 본 것으로 기억한. 나의 잃어버린 맛, 추억의 맛은 모두 시골 할머니의 음식들이다(우리 어머니는 요리에 소질이 없으셔서 딱히 추억할 만한 맛이 없다 -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아무래도 아버지의 기억에 있는 할머니의 음식들은 - 산골 마을의 종갓집에서 만들었던 대규모 저장 음식들인 듯한데 - 집에서 일을 봐주시던 분들이 아버지가 어렸을 적 모두 도시로 떠난 뒤로는 규모라고 할 것도 없이 대폭 축소되었고 - 무엇보다도 과자 따위를 직접 만들어 먹을 일까지 완전히 없어졌으니(나무로 된 과자 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데, 옛날식 수제 과자는 무슨 맛이었을까 궁금하긴 하다). 내가 추억하는 할머니의 맛은 아버지가 추억하는 할머니의 맛과는 또 다른 영역 - 할머니의 제사 음식이다. 아무래도 제사 지낼 시기에 주로 시골에 내려갔던 영향인 듯하다.

 제사 음식 이야기가 나오니 말인데, 일단 잃어버린 맛이고 되찾아낸 맛이고 다 떠나서 그놈의 제사 안 지내게 되어 참 좋다. 2011년에 가족들이 흩어지면서 - 아무 영양가 없이 그저 큰집이랍고 제삿상 차려야 되는 일까지 덩달아 없어진 셈이니 - 때가 해방(?)의 시작이었는지도. 벌써 7년째 제삿상 안 보니까 속이 다 후련하다. 더 일찍 집어치웠으면 또 어땠을까 싶지만, 사실 아버지께는 아버지 세대의 사정이 있었을 수 있음을 이해한다. 자기집 제사도 똑바로 안 지낸다는 고향/친척/친지들의 수근거림도 신경쓰였을 수 있고, 대를 이어 내려오는 의식을 온전히 이어가야 한다는 맏이로서의 의무감도 있었을 수 있고. 아버지도 각종 문헌을 찾아보시며 최종적으로는 제사를 두 번으로 압축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의식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이런 구태에서 모두 벗어났다. 입춘 때 입춘제나 간단하게, 혹은 벌초 때 간단하게 하신다고 한다(난 여기서도 빠졌다 - 애초에 무슨 과일이 씨가 몇 개니까 어디에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엔 관심도 없었다). 안 그래도 살아생전 할아버지 때문에 속썩는 일 많으셨던 할머니께선 때 되면 지내야 하는 그놈의 제사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 오죽하면 본인의 삶이 부처님이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하신 나머지 매일같이 지장보살을 찾지 않으셨던가. 다행히 손주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사주신 소고기 스테이크로 이번 추석을 보냈다고. 이런 상황에 할머니의 제사 음식이 기억난다면서 잃어버린 맛, 추억의 맛 운운하는 것도 조금은 우스울 수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골에서 먹었던 할머니의 맛은 뭔가 특별했다. 모두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새겨진 기억들이다.

 먼저 돼지고기 고추장볶음(정확한 명칭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불렀다). 제육이 아니다. 제육과는 완전히 다르다. 할머니가 제삿상에 올랐던 돼지고기 수육을 시골 고추장에 뽁닥하게 끓이듯 볶아주신 음식이었는데, 엄청난 밥도둑이었다. 원래는 며칠에 걸쳐 이런저런 제사 음식들을 모두 먹어치운 후 막바지에 할머니가 남은 고기 조금으로 양은 냄비에 볶아주셨던 건데, 내가 워낙에 잘 먹는 걸 아시고 나서부턴 제사가 끝난 후에 꼭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이건 요리에 소질이 있는 와이프에게 몇 번 부탁한 끝에 완전히 재현했다 해도 좋을 만큼 최대한 비슷한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마트에서 파는 고추장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맛이어서 - 시골의 막내 삼촌이 보내준 고추장(아주 진하고 군내나는)을 통해 비로소 맛을 낼 수 있었다(와이프에게 정말 감사하다).

 하지만 할머니의 탕국은 어떻게 재현을 시작해야 할 지 벌써 막막하다. 어머니께선 시골에서 내가 맛봤던 탕국들이 전부 어머니 본인의 작품이었다고 주장하시는데, 서울에서 어머니 주도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뒤로는 전혀 다른 맛의 탕국을 맛보게 되었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할머니의 탕국은 말린 문어를 넣고 푹, 정말 푸욱 끓인 것이었는데 - 도대체 얼마나 깊게 끓였는지 두부와 무우에 문어의 자줏빛이 염색되었음은 물론이고 두부는 너덜너덜, 무우는 흐물흐물. 국물 한 숟가락 뜨면, 아니 그 전에 그릇에 담겨져 나올 때부터 마치 한약을 달인 것 같은 깊은 향이 풍겨졌었다. 산골로 들어오는 잘 말린 문어, 그중에서도 비싸고 좋은 문어. 게다가 정성. 자그마한 버섯 건데기도 있었는데, 이 버섯 향도 분명하게 가미되어 있었다. 그 시골 군 일대가 나름의 집성촌인지라 여기저기서 친척분들이 몰려와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우리집이 제일 처음이었고 그 다음부터 다른 집들을 돌아다니며 하루에만 제사를 너댓 군데서 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항렬은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탕국 한 그릇 더 달라는 어르신들이 은근 얄밉기도 했었다. 그만큼 인기가 좋았기에 최대 이틀이면 모두 먹어치웠던 것 같다. 

 제사의 고약함을 떠나서 할머니 본인께선 단 한 번도 조상 탓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셨다. 오히려 평소에도 잘 모셨으면 모셨지 - 삶 자체가 인내와 기도셨으니. 이런저런 할머니 본인의 사연들을 끌어모아 혼신의 힘으로 끓여내신 거라고 해버리면 나만 이대로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리려나? 그냥 잘 말린 문어 사다가 푸욱 삶으면 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이제는 주변인들의 증언만 있을 뿐, 원본을 전수해주실 분이 안 계시니. 레시피야 어머니와 친가쪽의 증언들을 모아보면 어찌어찌 재구성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비결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그렇다고 와이프에게 잘 말린 좋은 문어 구해다가 몇 시간이고 푸욱 잘 삶아보시게 - 맛이 재현 될 때까지 해봄세 -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이다(과연 와이프 표정이 어떨런지). 이 맛은 지금은 군대에 있는 사촌동생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맛으로 알고 있다. 탕국 생각이 난다며 제사 지낼 때 우리집으로 찾아왔던 사촌동생이 할머니의 탕국 맛에 비해 몇 단계 아래인 어머니의 탕국 맛을 보면서 얼마나 싱거워했을까.

 누구 말마따나 그 당시의 주변 분위기와 공기, 곁들였던 음식 등이 더해지지 않는 이상에야 그저 추억의 맛일 뿐이어서 완벽히 재현할 방도는 없는 것이고 - 어찌어찌 해먹더라도 추억과는 다른 맛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그래도 딱 하나, 재현해보고 싶은 맛이 있다면 그것은 할머니의 제사 음식 - 중에서도 일품이었던 탕국이다. 그 외엔 잃어버린 맛이 없다. 피자, 햄버거, 돈까스 등등 언제든지 해먹거나 사먹을 수 있지 않나. 글쎄, 한 20~30년 뒤엔 나도 윗세대 혹은 윗윗세대 처럼 잃어버린 맛(교실 중앙 난로 뒤에 올려두었던 벤또의 맛이라던가)의 늘어난 목록을 들고 가끔씩 입맛을 다지며 추억을 뒤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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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5. 23:32 회고/아르바이트

 중고등학생 시절 오락실 갔다가 우연찮게 기계 옮기는 것 잠깐 도와준 일이라던가 친구와 함께 치킨집 전단 몇 시간 깔짝 돌렸다가 돈도 제대로 못 받은 것 등등 일회성을 뺀 경우라면 '코리아태틀러'라는 잡지사의 배본팀에서 일했던 게 사회에 나와 겪어본 생애 두 번째 아르바이트였다. 

 2006년에 친구가 소개해주어서 둘이 함께 일했는데, 봉고에 가득 실은 잡지들을 서울시내 유명 호텔이나 레스토랑, 미용실 등에 뿌리는 업무였다. 한 달에 2주 정도만 일이 있었는데, 학동사거리 모 빌딩 1층으로 배송돼온 제본품들을 카트에 실어 지하주차장에 보관해 두었다가 매일매일 필요한 만큼 봉고에 싣고 출발하던 기억이 난다. 요소요소 포인트로 차를 몰던 배 씨 성을 가진 기사 형님은 서울시내에 잡지의 광고효과가 클 만한 곳들을 몸으로 익히고 있는 전문가여서 나름 경쟁사의 콜을 받기도 했었는데, 마구마구라는 야구 게임을 좋아하는 노총각이었다. 지금은 장가는 들었는지, 잘 살고 계신지 어쩐지 모르겠네. 

 이 형님과 3인 1조로 다니며 이 가게에 몇 부, 저 호텔에 몇 부 - 지시받으면 가서 뿌리고 오는 육체노동이었음에도 딱히 힘들다는 생각 없이(몸이 한창때였던 것도 있고) 서울시내 요소요소 돈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포인트를 돌아보는 재미를 나름 느꼈던 것 같다. 언젠가 나도 군대 다녀오고 직장을 잡고 돈을 벌다 보면 저기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와인도 마시겠지라는 막연한 환상 아래로 목장갑을 낀 채 푼돈을 벌던 당시 현실이 엄연히 혼재 - 요소요소에 보이던 내 또래들을 부러워 했었지. 비싼 등록금을 내는 친구들은 돈이 어디서 났을까. 직접 번다면 어디에서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걸까.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데이트 할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등등. 사실 스무살이 되면서부터 바로 돈 벌이가 될 직업을 선택해 열심히 일했어야 했지만, 나고 자란 동네 분위기에 휩쓸려 정신 못차린 채 나도 나름 대학생이라는 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이대로 학위 따고 군대 다녀오면 그 직장이 내 직장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들. 가족들은 월세도 못 내며 허덕이고 있었는데. 

 점심 식사 후 봉고에 올라 학동사거리를 지나던 어느 날 - 낮이라 온통 환한데도 거짓말 처럼 여우비가 내리던 날 - 우연히 라디오에서 시원시원하게 뻗는 목소리로 바이브를 울리는 어느 멋진 노래에 팍 꽂혀버렸다. 가사를 들어보니 'Leave a tender monent alone~'. 바깥 풍경과 함께 이 노래에 심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도 가끔 이 노래를 즐길 때면 목장갑을 낀 채 봉고 밖 여우비 내리는 대로를 감상하던 그 때가 스친다. 3개월 정도 하고 관뒀는데, 이 노래와 인연이 생긴 것 하나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또 하나 좋은 기억은 아마도 경복아파트 사거리 어딘가로 기억하는데, 언덕길 오른편으로 있던 상가 지하의 기사식당에서 먹었던 왕돈까스가 참 맛있었다는 기억이다. 풋고추와 상추를 무한 제공하던 곳이었는데, 기사 형님이 아무래도 운전하시는 분이시다 보니 맛집들을 많이 알고 계셨던 듯하다. 다시 가면 아직 있을지 모르겠다. 한남동 언덕길에 있던 작은 와인집은 참 분위기 좋아 보였던 곳인데, 어딘지 모르겠다.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배송돼온 제본품들을 지하주차장으로 옮길 때면 차량 엘레베이터와 카트를 이용했는데, 친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움직일 때 노출된 벽에다 카트를 쾅 쳤다가 빼는 장난을 치다가 엘레베이터와 벽 사이에 카트를 끼워버린 사고를 냈던 것. 카트는 두 동강이 났고, 엘레베이터는 고장. 상황을 알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이 누구 짓이냐고 물었을 때 내가 했노라고 답을 했어야 했는데 - 내가 했소 - 라는 당당한 답변은 한참 느렸고, 오히려 친구가 사람 다쳤는지 걱정은 안 하느냐며 저쪽에다 역정을 냈었다. 온갖 생각있는 척 다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의 고백을 목구멍에 걸어버린 참 못난 모습이었다. 수리비는 기사 형님과 친구, 나까지 월급에서 얼마씩 제하는 걸로 마무리가 됐다. 두고두고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어서 이제는 벽이 보이는 엘레베이터는 일단 타고 싶지도 않고, 탈 일도 거진 없고, 타더라도 벽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서있는다. 한편으론 카트를 뽑아내겠다고 무리하게 들이댔더라면 나까지 저세상 갔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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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7. 1. 22. 22:21 회고/개포동

 기억으론 개포 주공 314동에 살았을 때 같으니, 당시 초등(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두부 한 모 사오라는 어머니의 심부름에 3단지 다 상가(2단지는 나 상가)에서 두부 한 모를 까만 봉지에 담아서 들고 오는 길.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두부 봉지를 마구 휘둘러 벽과 난간에 쾅쾅 치면서 5층 집까지 올라갔는데, 어머니께서 왜 순두부를 사왔느냐며 혼내시는 게 아닌가. 억울한 마음에 나는 절대 순두부를 달라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 결과 결국 어머니가 다 상가로 따지러 가셨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게 자꾸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나의 철없음이나 어머니의 허탈함 때문이 아니라 - 두부 봉지를 풀스윙으로 벽에다 쳤을 때 - 봉지 손잡이를 꽉 쥔 손에 전해졌던 그 촉감을 잊을 수가 없어서인 것 같다. 그 묘한 쾌감. 다시 느껴보고 싶다. 과연 기회가 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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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20. 22:58 회고

 지난 주말 오랜만에 거실 소파에 앉아 K리그 경기, 수원FC 대 울산의 경기를 보니 수원FC는 영락없는 2부 강등 위기였다. 리그 종료와 함께 승격과 강등의 희비가 교차되는 지점이 올텐데, 선수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벌써부터 좌절감을 맛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선수들의 좌절을 주제삼았던 '청춘FC'라는 프로그램 이야기가 떠오르면서(아직 시청하진 않았다) 다시 문득 - 옛날의 그 형도 함께 떠올랐다.

 그 형을 만난 게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지, 6학년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방과후 수영 학원에 다닌 줄 아셨겠지만, 나는 가는 척만 하고 혼자 동네 놀이터 혹은 학교 운동장을 배회하고 다녔었다. 수영복과 수영모 등은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시기 전에 락스를 살짝 푼 물에 넣어 수영장 냄새가 나게 해뒀었고. 아마 같이 다니는 친구 없이 혼자 버스 타고 수영 학원에 다니는 게 재미가 없었던 모양. 하루는 학교 운동장에서 당시 느끼기에 엄청 크고 나이 많아 보이는 운동복 차림의 형 하나가 함께 축구하자며 나를 불렀는데, 양쪽 농구 골대 사이의 비교적 좁은 공간을 토대로 골대 기둥 맞히기를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수영 학원에 가는 날, 꼭 그 시간 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 그 형에게 축구 교습도 받고, 시합도 했었는데 - 간단히 대각선으로 치고 달리기와 접기 두 가지만 배웠는데도 또래들이 허수아비로 보이기 시작 - 자신감과 재미가 동시에 붙기 시작했었다. 아마 이 인연이 아니었다면 중고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축구를 그렇게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을까? 그 형은 2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중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었다. 인연은 길지 않았다. 몇 주쯤 지난 언젠가 부터 그 형이 나타나지 않기 시작한 것. 비록 짧았지만, 그래도 기억으로 남기엔 충분한 인연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도 한두 살씩 계속 먹어오다 보니,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어떤 분야의 프로를 꿈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불가능이라는 비실체적 임시 관념을 부정하며 내면을 불태우는 것이야 말로 인간만의 숭고함이 아닐까(인류는 현실 부정을 통해 집단으로 진화해 왔다 했던가) - 해서 '청춘FC'가 탄생 - 그 과정에 감동했던 주변 지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추천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당시의 그 형은, 진심으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지점. 아쉽게도 척박한 환경 속 실체적 고정 관념이 기억속 그 형을 짓누르고 있네. 모르긴 몰라도 제이미 바디를 꿈꾸는 제2, 제3의 '그 형'들이 요즘도 어딘가의 운동장을 배회중일텐데 - 좌절이 끝이 아닌 환경이 하루아침에 나타나길 바라는 것도 못된 심보겠지. K리그 클래식도 좋지만, 챌린지에도 너무 무관심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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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
2015. 11. 21. 14:19 회고/고시원

 

 어떻게든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없애 보겠다고 나름 열심히 밝은 것들로만 이것저것 붙여서 꾸몄던 고시원 방 - 세모로 잘린 방 - 가끔씩 위 사진을 열어 보면 웃음이 난다. 1평도 안 되는 방의 저 작은 침대에서 잤는데도 용케 굴러 떨어진 적이 없으니 용하기도 하고. 냉장고 문이 45도만 열려서 짜증났던 기억도 나고. 방문을 등지고 최대한 카메라 렌즈를 뒤로 뺀 뒤에 찍은 사진이다.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좌측으로는 책상 위 모니터와 작은 서랍장, 우측으로는 베개가 있었다. 베개 위로는 옷들이 줄줄이 걸려있어서 누워도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방의 빗변에 맞춘 책상이 비스듬하다.

 개포동 주공아파트 3, 4, 1, 2단지를 차례로 순회하며 보증금 다 까먹고 쫓겨나듯 이사하기를 여러번 - 당시 우리 가족은 임계점이 왔음을 직감하고 뿔뿔이 흩어져 각개전투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한된 예산(30 만원 미만)을 가지고 급하게 혼자 지낼 방을 구해야 했는데, 동네 근방에서는 마음에 드는 방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일단 퀴퀴함이 너무 싫었다. 서로의 암내/땀내/쉰내가 뒤섞인 것만도 상당히 역한데, 햇빛 없이 형광등으로만 유지되는 밝기는 TV에서 본 감옥 보다도 구려 보였다. 해서 무조건 창문이 있는 방으로 가겠노라 조건을 하나 정하고 보니 결국 흘러흘러 논현역까지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게 2011년 3월이었다. 한 달에 28 만원, 장기 투숙일 경우 할인해 주므로 나중에는 27 만원씩 냈었다. 고시원에서 고시텔로, 고시텔에서 리빙텔로 명칭이 바뀌어가는 듯했지만 고시원이 그냥 고시원이지 뭐가 다른가 싶어서 그냥 고시원이라고 부르고 다녔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 고시원을 리빙텔이라고 명칭 세탁하는 거야 말로 쪽팔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좋은데 살 돈 없어서 고시원 사는데 뭐, 어쩔 건가.

 앞으로 제목을 '고시원 2', '고시원 3' 따위로 지어서 당시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모아 볼까 생각중이다. 일단은 개인적인 감상용 기록이고. 실상 누가 관심있게 보겠나 싶지만 어쨌거나 그 기간 동안 죽지 않고 어찌어찌 숨 붙인 채 살아나갔다는 - 심지어 조금 더 넓은 네모 방으로 옮기기도 했고 - 비교가 좀 우습긴 하지만 노숙자 보다는 편하지 않았는가. 하나의 참고 삼아서, 재미 삼아서 볼 수 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나야 운좋게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2년 7개월의 고시원 생활을 마감하고 탈출했지만, '헬조센'의 현실 속에서 고시원 생활로 내몰린(릴) 청춘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 고생길을 잠시나마 겪었던 사람으로서 그 모든 분들께 고시원이란 곳이 그저 잠시 거쳐가는 곳으로 기능해주길 바랄 뿐.

posted by 생마
2015. 9. 28. 23:00 회고

 이번 추석 휴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내게는 친숙한 곳인데 - 2011년 봄 부터 여름까지는 모바일 게임 회사의 직원으로, 가을까지는 창업아카데미의 수강생으로서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기 때문 - 회사가 있던 곳, 강의가 벌어지던 곳이 남산골 한옥마을과 딱 붙어있는 동국대 창업지원센터다. 오랜만에 보자니 옛 생각이 났다. 겨우 4년 만인데, 옛 생각이라고 표현해도 되나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네. 몸도, 마음도, 생각도 그 때에 비해 많이 변해있는 상황이니까. 고민 많던 미간의 힘은 풀렸고, 담배와도 연이 끊겼다. 발걸음 넉넉히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다시 찾았네.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한국적인 것을 찾아와 잠시간 구경하고 가는 목적이겠지만 나는 와이프의 손을 잡고 추억 서린 곳들을 즐거이 찾아다녔다. 

 매일 밥 먹던 근처 식당은 없어진 곳도 있고, 그대로인 곳도 있다. 첫 출근날 저녁 먹었던 그 식당의 그 자리 보면서 미소. 여전히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가 줄지어 있고, 탄압받는 파룬궁 홍보도 그대로. 내부는 그리 큰 부지는 아니지만 오가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곳들이 몇 군데 있다. 정문에서 우측 길로 걸으면 나오는 관어정은 물고기 풀어놓은 작은 연못이다. 별스러운 것은 없지만 따사로운 햇살 피해서 가만히 앉아있기 좋았던 곳이다. 그 전에 있는 청류정은 주로 아줌마들 도시락 먹고, 아가씨들 차 마시던 곳. 나는 그 옆 돌 위에 앉아 담배 피우곤 했었다. 

 좌측으로 있는 국악당은 산책길에 가끔 들어가 처마 밑의 의자에 앉아 쉬던 곳. 특히 비오는 날 운치가 좋았었다. 처마 끝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뚫고 국악당 본채에서 국악 소리가 새어나오는 때가 있었는데 - 티켓 끊고 들어가 정식으로 공연을 즐길 만한 여유는 없었지만 적당한 음량으로 깔린 국악과 비 내리는 처마에 시원한 바람까지 맞고 있자면 되려 내가 더 비싼 야외 티켓을 끊고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부러 비오는 날 찾아간다고 그 느낌이 다시 날런지는 모르겠다. 딱 그때만의 그것이었겠지. 그 자리에 와이프 손 잡고 다시 앉아봤다.

 그 외에 윗쪽 길로 돌아서 한옥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있는 낮잠용 벤치도 보고. 편의점 도시락 까먹던 호수 옆 의자. 가끔 공연 구경하던 무대 등등. 2011년 당시 세모로 잘린 비좁은 고시원에 살던 내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줬던 곳이다. 몸도 마음도 좁게만 있을 수밖에 없던 때에 잠시나마 너른 여유, 운치까지 주던 곳이었다. 고시원에 누워있자면 복도 지나가는 사람 슬리퍼 끄는 소리만 들려도 기분 거슬리게 마련인데, 남산골의 사람 지나다니는 소리는 어찌나 풍경 같던지. 참으로 좋은 터에 좋은 풍경이 자리잡은 곳인 것 같다. 한 번 둘러보고 스쳐지난 풍경이 아니라 매일 들러 즐길 수 있던 곳이라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동국대 창업지원센터 부지와 매일경제 부지는 너무 아까운 것 같다. 양측 모두 건물 생김새도 흉물스럽고. 그 자리에 멋진 한옥빌딩을 좌우로 짓고 제대로 된 창업지원센터를 만들고 싶다고 - 생각만 했었다. 생각만. 실현은 거진 불가능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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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