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엑스에 갈 일이 있을 때 삼성역 말고 봉은사역이란 훌륭한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 탄천과 가까운 이 봉은사역은 - 내가 한창 삼성역 근방에서 자주 놀던 때, 양재천을 끼고 살던 시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원랜 없었던 역이다. 탄천은 양재천의 물줄기를 이어받으며 삼성동/대치동/개포동/일원동/수서동 등과 맞닿아있다. 과거 친우들이 모두 양재천과 탄천 생활권에 살고 있었고 평소에 천변을 따라 걷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기에 - 그랬기에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그 지점의 아름다움을 나는 알고 있었다. 탄천을 가로질러 잠실 쪽으로 건너갈 때나, 코엑스 쪽으로 건너올 때나 - 적절하게 부는 바람과 물내음은 어김없었고 - 따스하고 나른한 오후에 '봉은교' 아래에서 그냥 그 근방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물론 좋아했지만, 특히 다리 위에서 탄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물줄기가 노을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커피숍. 최근 붙여진 도로명 주소로는 '봉은사로'라 명명된 거리의 커피숍. 사실 '봉은교'도 지도를 찾아봤기에 아는 명칭이지 사실 평소 내 머릿속엔 그냥 '탄천 끝 그 다리'로 입력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 거리 또한 그냥 '그 거리' - 그럼에도 '그냥 그 거리'라고만 언급하기엔 아쉬운,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봉은사로에 있는 커피숍의 야외 테이블에서 - 커다란 가로수 낙엽(플라타너스 잎)을 굴리는 쌀쌀한 가을바람이 내 몸의 모든 감각을 통해 각인됐던 아름다운 경험 덕분이다. 따듯한 커피와 함께여서 더 그랬을까 - 쌀쌀하지만 날카롭진 않았던 그 가을바람과, 다시 언급하게 되는 '구르는 낙엽'의 시각적 효과까지 꽤 감각적인 요소들이 겹쳤던 것 같다. 도심의 밀집된 빌딩숲에서 벗어나는, 작은 도로를 통해 천변으로 나오는 일종의 과정이자 틈새 같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이 거리는 - 빌딩숲과도, 한강과도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임에도 - 탁트인 한강의 거대한 물줄기과 그에 수반되는 강바람이 자아내는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주 정도 전이었을까. 오랜만에 코엑스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기억 속 봉은사로의 그 커피숍을 찾아갔다. 내가 기억하는, 봉은교와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야외 테이블도 있었던 그 커피숍은 없어진 듯했고 대신 근처에 스타벅스가 영업중이었다. 하지만 스타벅스는 그 특유의 획일화된 익스테리어/인테리어로 점철되어 있었고, 당연히 야외 테이블도 없었다. 따듯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실내 테이블에 앉을 수는 있었지만, 바로 그 거리에서 느끼고 싶었던 그 가을 풍취를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하기야, 예전 그 때가 대체 언제적인가 - 똑같은 커피숍이 어떻게 아직까지 그대로 영업중이겠나. 시간에 따라 무엇이든 풍화되는 법. 봉은교에서 한강 방향으로 바라보는 탄천 끝 풍경은 여전히 보기 좋았지만, 타이밍이 조금 일렀기에 노을까지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봉은교 다리 위에서 탄천 내음 물씬한 바람은 마음껏 맞아볼 수 있었다. 그바람에 마음의 흔들림도 있었다. 덕분에 실망스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다음번엔 건너편에 있는 커피숍들 중에 야외 테이블을 보유한 곳도 있는지 찾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