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제버거를 관둔 뒤 곧바로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하다가 면접 보고 나가기 시작한 H 호텔의 스파와 라운지 관리 업무. 꼭대기 층에 스파와 마사지실이 함께 있고, 나선형 계단을 타고 한 층 올라가면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는 구조였다.
출근 첫날에 매니저와 인사한 후 선임자를 따라다니며 따뜻한 물 틀어놓는 시간 등등 스파 셋팅 업무를 먼저 익혔고 이후 화장실 휴지를 세모로 접어놓는 법이라던가 화장대 셋팅하는 법, 신발 정리하는 법 등등을 추가로 배웠다. 그간 경험해왔던 업무들에 비하면 노동 강도는 확실히 낮은 곳인데다 고급 인테리어가 주는 안락함과 탁 트인 창밖 경치도 좋아서 크게 기대되는 업장이었다. 우리는 스태프 방에 모여있다가 일이 있으면 잠시 나와서 일을 보고 다시 들어가는 형태인데, 처음 본 다른 분들도 모두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확실히 스태프들끼리의 친근감이라는 게 있어서 하루만에 정들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
하지만 큰 기대는 순식간에 큰 실망으로 이어졌다. 보통 셋팅을 다 끝내놓고 나면 다음 셋팅 확인 시간이 아니고선 클레임이 들어올 때 불려나가거나, 여성 마사지사들은 마사지 요청하는 손님이 있을 때 불려나가는데 - 하나같이 되돌아 올 때의 표정이 아주 어둡고 슬픈 표정들이 아닌가. 사연을 깨닫는 데에는 딱히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H 호텔에 와서 이러한 시설들을 주기적으로 즐길 정도가 되는 사람들이면 어느정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있을 터 - 온갖 희한한 갑질은 물론이고 남에게 말 못할 마사지실에서의 사정들. 스태프들끼리 끈끈한 유대로 뭉치는 건 어찌보면 정신줄 붙잡고 살아가기 위한 감정의 연대였을지도. 점점 열이 받아가던 시점에 나이로는 두어살 어렸던 동생이 자꾸 자기에게만 클레임을 거는 사람이 있다며 이따 불려나가면 같이 가서 봐달라고 - 드디어(?) 갑질의 현장을 직접 볼 기회가 생겼는데, 가서 보니 엄마가 차려준 회사에서 해외 유명 IP 비슷하게 베낀 걸로 잘나가던 모 회사 대표가 특유의 찌질성을 뽐내면서 새로 세탁돼서 나온 가운을 붙잡고 여기서 나는 냄새가 구리네 어쩌네 - 내가 맡아보니 그냥 모텔 가운 냄새 같던데, 호텔 가운은 향수 뿌려서 나와야 되나? 물론 신사적이고 깔끔한 손님들도 있었고, 새로운 사람이 온 것에 관심 가지며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한 손님들도 있었으나 - 혹시 내가 희한한 갑질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혈기왕성하여 끓는 피가 증발할 정도라는 걸 스스로도 느끼던 시절인데, 혹시라도 손님 명치를 발로 깐다거나 멱살 잡고 캐비닛에다 밀치는 사건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매니저에게 잘 이야기하고 마무리. 출근 첫 날이, 마지막 근무 날이 돼버렸다.
기억에 남는 건 화장실이 매우매우 아늑하고 조용한데다 창 밖으로 경치까지 좋았던 것이고,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이슈는 당시 현역이었던 맨유의 박지성 선수가 H 호텔에 왔다는 것. 모두 박지성이 온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우리가 곁에서 알게 될 그의 사생활을 지켜주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마침 박지성 선수가 신발장으로 처음 올 때 입구 쪽에 있다가 묵례도 주고받았는데, 어디가서든 계속 자랑할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가 스파에 입장할 때에 어디선가 덜렁거리는 소리가 나서 우연히 보게 된 - 월드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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