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조상님 묘를 이장하는 꿈을 꿨었는데, 꿈 해몽을 보니 직장 등을 옮길 일이 생긴다고 하여 와이프에게 말했다가 핀잔만 들었었는데(입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상한 소리 하냐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우습다. 물론 픽션, 재미의 영역이지만 말이다. 수요일 새벽에는 옛날에 알던 허풍선이 친구에게 악령이 깃들었는데, 승용차 뒷자석에 묶어뒀던 이 악령이 손을 뻗어 내게 해코지 하려고 달려들던 꿈 때문에 크게 한 번 설쳤고. 오늘 새벽에는 어디 누각 같은 곳에 하얀 옷들이 걸려있는데, 갑자기 공중에 정체모를 피가 흩내리며 옷들이 피로 물들여지는 꿈. 이건 뭘까. 어떻게 해석해야 그럴싸 할까 잠깐씩 생각하면서 출근.
냉장고에 있던 마테차 하나 따서 마시며 업무 시작. 정리 업무 진행하던 것들 마무리 및 로그 남기기. 문 과장님께는 내일까지만 출근하는 걸로 결정했다고 말씀드렸고, 대표님과는 회의실에서 잠시간 면담하며 결정 사항을 말씀드렸다. 합의한 대로 권고사직서는 내가 서식 찾아서 살펴본 후, 몇 군데 다듬어서 각자 원본 한 장씩, 회사 날인도 받았다(서식은 이 사원님도 필요로 하셔서 공유했다). 일단 이번달 일한 급여의 절반은 기존 급여일에 나올 예정이라 들었고, 나머지는 가능한한 빨리 받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렸다. 임금채권 시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내 생활이 힘들어지는 게 문제이니. 대표님께서 오늘과 내일은 시간 편하게 쓰라고 배려해 주셨는데, 그래도 업무 시늉이라도 내다가 마무리 할 생각이다.
하루종일 모두들 대표님과 면담하랴, 짝지어서 얘기 나누다 들어오랴 분위기 어수선했다. 최종적으론 김 부장님, 나, 이 사원님 이렇게 셋이 관두게 되었네. 오후에는 문 과장님이 커피숍으로 부르셔서 클라이언트팀 마지막 티타임도 가졌다(문 과장님이 아이스티 사주셨다). 이 사원님은 사회 초년생이라 경험도 없으시고 경황도 없으셔서 내가 아는 선에서 이런저런 실업급여 정보 등을 나눔했다(180일은 넘기신 상황이라 그래도 다행). 옥상에선 우연히 소장님과도 만나게 되어 이런저런 상황 이야기, 사업 이야기 등등 나누었다. 소장님과 대표님 모두에게 말씀드렸지만 - 일부러 연락해서 불러주실 만큼 좋게 봐주신 점에 감사드린다. 안정적인 상황은 아니나, 내가 더해짐으로서 더 나은 조직이 될 거란 기대를 하셨을 수도 있고 말이다. 월말 직전의 통보가 썩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만큼 투자측을 믿고 있었을 수 있고, 벌어지지 않은 일로 사무실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을 수 있고. 무슨 강요의 분위기도 아니고, 내가 크게 희생한다거나 희생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 그저 각자도생 속에서, 결국 말라 죽든 아니면 다시 살아나든 - 당장 조직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밸런스가 있다면 그 밸런스를 살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 임금 삭감을 감내하고 회생을 바라시는 분들께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 경제적 탄력성이 충분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상 나는 시간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
점심은 혼자 구내식당. 닭볶음탕이 나와서 실컷 먹었다. 짐들은 웬만큼 다 싸놔서 내일 몇 가지만 간략하게 챙기면 된다. 퇴근 직전에 회식 이야기가 나왔는데, 지금 상황에 무슨 회식이냐는 분위기도 없잖아 있었으나 결국 염 대리님 제외 모든 임직원이 지난번에 함께 했던 고깃집에 모이게 되었다. 사람 사는 게 참 우스운 게 - 어쨌든 함께 고기 먹고 술 마시고 몇 마디 신변잡기로 시작하다 보니 금방 왁자지껄 - 무슨 신나는 일 생긴 것마냥 시간 보냈네. 일부러 더 그런 이야기들을 꺼냈던 것인지도. 울상이던 이 사원님도 어느정도 풀리시는 듯했다. 9시 반 쯤 자리를 파하고 마지막 인사 나눌 분들과 마지막 인사 나누었다. 부디 행운이 있고, 빛이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