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다양한 업계의 여러 트렌드에 관심 많은 사람들에겐 웬 늦바람이냐 싶었겠지만 - 어쨌든 비교적 최근 이슈가 됐던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처럼 워플밸(Workplace Balance) 또한 매우 재미있는 주제가 아닌가 한다. 출근 준비 등의 모든 제반 시간들을 합하면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 일터에서 보내게 된다는 주지의 사실 - 과연 내가 일터에서 균형 잡힌 인생을 누리고 있는가 고민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당연히 사람에 따라 모양이나 카테고리가 다르겠지만 - 나는 보통 육각형(벌집) 정도의 방사형 그래프에다 위상, 대우, 커리어, 조직, 운영, 인간관계 정도를 카테고리로 삼곤 한다. 물론 위의 카테고리 키워드들은 상황에 따라 개념적으로 독립적이지 않을 수 있고, 아예 키워드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꿔버려야 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알량한 도식 정도에 꼭 들어맞게 이해될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밸런스를 정량화 시켜보려는 노력은 마치 통증 점수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최고로 아픈 걸 10점이라고 했을 때, 지금 몇 점 정도로 아프냐는 간호사의 질문을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10이 어떻고 5가 어떤지를 확실히 겪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4라고 하든 6이라고 하든 기준 자체가 모호하고 - 또 간호사는 뭘 근거로 나의 4와 6을 판단할 것인가? 그래도 내가 6이라고 하면 6이고, 간호사도 6이라고 알아듣는다. 내가 가중치를 줘서 8이라고 말해도 어쨌든 간호사는 - 이 환자가 죽을 만큼 아프진 않지만, 평소 보단 꽤 많이 아픈 상태라고 알아듣는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될 것 같다.
먼저 어딘가에 입사를 해야 워플밸이든 뭐든 따져볼 수 있을텐데, 아무리 내가 열심히 알아봤어도 실제 다녀보기 전엔 해당 회사가 실제 어떤지 알 수 없다는 구직자의 리스크는 정말 어쩔 수 없는 듯싶다. 특수한 경우 아니고선 무조건 구인기업이 구직자 보다 손해를 덜 보게 돼있는데 - 구인기업 입장에서는 수습 제도도 있고, 결국 조직이라는 게 특출난 능력자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이사람 저사람 섞여 평균치로 굴러가게 돼있으므로(조직관리에 뛰어난 회사가 아니라면) 누구 하나 조금 잘 뽑고 못 뽑고로 회사의 밸런스가 크게 해쳐지진 않기 때문. 하지만 구직자는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 웬만한 과감성 아니고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잃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 워플밸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입사 전/후의 차이 없이 계속 같은 요소들이므로 고민거리가 더 늘어나진 않는다는 것. 선택하는 시점에 천운만 따라주면 된다.
점수 배정은 어차피 각자 나름이겠지만(가중치 설정 포함), 일단 6각형 카테고리 하나당 10점 - 총 60점 만점으로 놓고 보는데 - 내 경우엔 보통 입사 전에는 각 요소들의 평균점을, 입사 후에는 총점을 살펴보는 편이다. 평균 6점 미만은 이력서를 내거나 면접 볼 필요도 없는 회사지만, 구직 기간이 길어지다 보면 5점 미만으로 기준치가 내려가기도 한다. 입사 후에는 총점 30점 미만이면 위험 수위, 25점 미만이면 퇴사 고려로 본다. 6각형으로 각 잡고 보려는데, 아무리 봐도 육각형 모양은 커녕 여기저기 찌그러져 축소돼있으면 이곳은 도저히 내가 살 집이 못 되는 것이다.
과거 프로그래머 신입으로 입사했을 때는 평균 점수로 회사를 거르는 등의 기준은 아예 갖고 있지도 않았었다. 위상이나 대우를 고려할 처지도 아니었고, 조직이나 운영 등은 경험이 짧아 판단 근거도 없는 상태였다. 그저 커리어 하나만 보고 입사했었기에 조직이나 운영 등에 불만이 있어도 - 내가 적어도 2년간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마인드셋, 커리어에 대한 높은 가중치 하나로 다른 모든 것들을 커버하며 다녔던 것. 그러다 우연히 협력사 파견 이야기가 나왔고, 마침 트렌디한 기술 - 협력사의 유니티 기술이 탐났던 나로서는 당장 몸 담고 있던 회사의 커리어 가중치가 그대로 증발해리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기가 미적미적 하는 사이 과감하게 먼저 가고 싶다는 건의를 올렸고, 그렇게 되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찌그러진 육각형을 커버하던 가중치가 없어졌고, 워플밸 이전에 워크플레이스 자체를 리셋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던 것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Y 씨는 조직과 운영과 인간관계에 불만이 많다(조금 보수적인 회사다). 오직 해당 기업이 차지하는 위상과 - 어쨌든 대기업이 제공해주는 평균 이상의 대우에 가중치를 얻어 찌그러진 육각형을 커버하며 다니고 있는 것인데 - 실질적으로 그 위상과 대우의 가중치를 통해 타이틀과 자산을 축적하면서 결혼과 육아라는 숙제도 멋지게 해낼 수 있었고, 먼 미래에 대비할 체력도 비축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위상에는 별 감흥이 없어지고, 연봉 상승률도 계속 정체 중인 상황 - 가정적으로 지출할 돈까지 많아진다면 대우 카테고리의 가중치와 실점수가 확 줄면서 위험 수위로 접어들게 될 수 있다. 이렇듯 한 번 맞춰진 밸런스가 똑같이 지속되기는 어려운 법이고,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컨디션에 따라 매일매일 이곳 저곳의 가중치가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도 있다.
약 두 달 전 불알 친구를 통해 갑작스럽게 이직 오퍼를 받았었는데 - 당시에는 지금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웹 기반 회사에 바로 들이대기도 애매한 듯하여 미적미적 돌려서 의사 표현을 했었다. 지금 회사의 밸런스가 당장 리셋해야 할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점이 컸다. 이후 지지난 주엔가 오랜만에 와이프와 신촌 거리의 젊을을 만끽하며 안코드란 가수의 버스킹 공연을 구경했었는데 - 왜 일부러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사느냐 당신은 월세를 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참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계속 하기 위해 월세를 내는 중이다 - 라는 가사를 듣고 큰 충격에 빠진 뒤로 월급쟁이 생활 자체가 너무 싫어져서는 - 아예 지금의 모든 밸런스를 과감하게 엎어리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하는 중이다. 복잡다단한 세상 속에서 언제 어떤 이벤트에 휘말릴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기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대략적으로라도 카테고리와 키워드들을 정리하면서 - 향후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붙잡고 생각을 써볼까 한다.
1. 위상 - 브랜드, 시장, 업종, 성장, 안정, 비전, 관계법령
2. 대우 - 기본급, 상여금, 수당, 지분, 이익공유, 직급, 직책
3. 커리어 - 기술력, 프로젝트, 업무범위, 업무내용, 적성, 성장, 이직
4. 조직 - DevOps, 관리기법, 관리기술, 교육, 체계, 토론, 수렴, 리드
5. 운영 - 공무, 지원, 구매, 위생, 비품, 워라밸, 복지, 문화
6. 인간관계 - 상사, 동료, 공사구분, 친목, 뒷담화, 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