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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7. 21:21 단상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들 - 들을 땐 그냥 담담하게 듣고 말았지만, 가끔은 곱씹어 보게 된다.

 더운 여름 어느날, 퇴계에게 제자 되기를 청하러 두 사람이 찾아왔다. 당시에도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한 면접 같은 게 있었던 모양. 입학 면접을 보기 전 같은 방에 들어가 대기하던 두 사람. 퇴계가 하인을 시켜 이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오라 했는데 - 한 명은 날이 너무 더워 못 견디겠다며 옷을 훌렁훌렁 벗는가 하면, 밖으로 나와 물가에 가서 어푸어푸 세수까지 하더라는 - 다른 한 명은 그대로 꼿꼿이 앉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고. 퇴계는 의외로 흐트러짐 없던 사람을 그대로 돌려보내고, 더위를 못 견뎌하던 사람만 제자로 삼았는데 - 인간미가 없는 사람은 학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우암과 허미수는 당대 두 붕당의 거두였는데, 임금 앞에서 서로 상대방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아뢸 정도로 대립중이었다. 우암이 큰 병을 얻자 곧 아들을 불러 하는 말이 - 허미수에게 가서 처방을 받아오라고 - 허미수는 학문 뿐만 아니라 의술로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 우암의 아들은 적군의 수장이나 다름 없는 허미수에게 처방을 받아와야 한다는 것에 불만이 많았으나, 허미수는 우암의 증상을 듣고 흔쾌히 처방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처방에는 비상이 들어가있었고, 당연히 우암의 진영에서는 이 처방대로 약을 지어선 안 된다며 격론이 일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암은 허미수의 처방을 믿고 비상이 들어간 그대로 약을 지어 먹었고, 다시 건강을 회복했다. 당대 두 거두의 인간적 도량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학자로서의 자질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정치가로서의 도량 이야기가 아닐런지. 열심히 배울 때의 자세와, 나아가 그것을 실천할 때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가 되짚어주고 있기도 하다. 진솔하지 못하고 - 뻣뻣하고 고지식한 사람이 그 고집과 체면을 꺾고 자신의 실수나 오해를 온전히 끌어안으며 그것을 교정해 나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아가 진솔한 학문을 하지 못한 채 성장하여 꽉 막힌 정치가로 변모한 사람이 인간적 도량을 발휘하여 - 의견이 달라 날카롭게 대립하던 사람들을 향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나 의리를 발휘할 것이란 믿음을 가지기도 힘들다.

 세상 숨가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디 인간미 충만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빛내주길 바라는 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옛 사람들의 통찰을 엿보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퇴계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다른 스승을 찾아가 배움을 계속한 끝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훗날 사화에 휘말려 크게 해를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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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생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