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술판이 거의 파해가고 숙소로 돌아오던 중에 Ph 님과 언성이 높아졌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별의별 쌍욕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음. 욕까지 나올 일은 없지 않았나 싶은데 - 아직 세상 험한 걸 좀 덜 보셨나 - 행여나 내가 욕먹은 걸로 화딱지난다고 모욕 운운하고 회사 상대로도 들이받으면 그 귀찮음을 어쩌시려고. 어쨌거나 이건 남자들끼리 술한잔 하면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 핵심은 그간 쌓였던 내적 갈등이 터졌다는 것이겠지. 싸움 아닌 싸움(?)은 주변에 계시던 분들이 말려주셨다. 나는 욕 대신에 - 하고 싶었던 말들 내뱉었다. 그까짓 나이랑 직급이 뭐라고. 밥그릇이랑 텃세가 뭐라고. 개발해놓은 게 뭐 얼마나 잘난 거라고.
잠이나 자려고 잠깐 누웠다가 - 어차피 밝아오는 날의 일정이 즐거운 시간은 못 될 것 같고, 회사에도 더 흥미가 없어져서 - 다들 잠 들었을 즈음 조용히 가방 싸서 신발 신고 나오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Ji 님이 함께 입구까지 오시면서 이건 악수를 두는 거라 좋지 않다고 계속 말려주셨다. 덕분에 설득당하면서 이런저런 진솔한 이야기들도 나눌 수 있었고(잘 들어주셔서 감사드린다 - Ji 님의 스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최소한 다음날 아침에 얼굴 보고 인사는 드린 후에 서울로 출발하기로 결정.
밤새 주변 강가의 자갈도 밟고, 물 소리도 듣고, 별도 보고. 참 걷기도 많이 걸었다. 새벽 2시 부터 거의 4시간 가까이(새벽 닭울음 직접 듣기는 또 정말 오랜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크게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 솔직히 이 회사 억지로 버틴 감이 있었다. 초반 3개월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느낌도 계속 이상한데 - 내가 수습이라 그런가? 혹은 내가 정말 어딘가 부족해서 그런가? 월급 안 말리고 잘 들어오는데다가 야근도 없고 집도 가까우니까 - 일단 자격증 얼른 하나 따고, 6개월 이후부턴 짤려도 실업급여 나올테니 - 마음 놓고 다른 데 알아보자고. 딱 한 달만 더 채우면 위의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데, 이거 다 못 채울 수도 있겠구나.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Mt 님이 가장 먼저 숙소에서 나오시길래 사정을 말씀드린 후 근처 역으로 이동해서 집으로 복귀.
이번 일로 정말 크게 하나 깨달은 게 있다. 겸손은 무조건적 미덕이 아니므로 되려 독이 될 때도 있다는 것. 남의 겸손이 보이면 순간 그것마저라도 밟고 올라서고 싶어하는 사람이 분명 있다고. 연계해서 외부의 조언을 얻었던 게 생각났다. 한 분은 - 남 잘한 거 절대로 칭찬하지 말고, 내가 못한 거 절대로 사과하지 말라고. 당시에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 그런 환경이라면 삶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내 스타일과 전혀 맞지도 않고)란 생각도 했었는데. 보아하니 그래야만 그나마 덜 피곤해지는 환경/사람이 자신의 일터에 펼쳐져 있다면 그게 맞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또 하나는, 어중이떠중이가 많은 바닥에선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실력자라고. 왜? 진짜로 이기면서 살아온 사람은 겸손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테니.
둘째로 깨달은 건 - 나름의 경험을 쌓아오며 이미 하나의 원칙으로 세워뒀던 건데 - 이 원칙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다시금 확신하게 된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처음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나에게 다가와(관심 가지며) 다른 사람들 흉을 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해당 조직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사람이란 것. 나약하기 때문에 멘탈 버퍼 없이 상처도 너무 쉽게 받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편이 필요하고, 자기 편을 만들어야 되니 이래저래 세심한 듯 비쳐지지만 - 어딘가에선 결국 나도 무참하게 씹히고 있기 마련이고, 니편내편이 자꾸 나뉘는 - 조직을 좀먹는 벌레. 난 회식자리 몇 번 보니까 딱 알겠던데 - 벌레가 껴있는 테이블 분위기가 주로 어떤지. 그냥 피하는 게 상책. 사람이 하도 희한해서 이거 술 한잔씩 걸치고 서로 형동생 스타일로 풀면 좀 풀리려나 했더니 - 어째 더 미친놈 처럼 날뛰려고 드네. 비슷한 타입끼리 친한 것도 사이즈 나오고.
그간 다녀본 직장들은 - 직종을 떠나서 다 큰 성인끼리 최소한의 조심성과 예의가 있었고, 크게 모난 사람 하나 없었는데 - 직장에서 아무리 친해봐야 결국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각개전투의 전우애가 느껴졌는데. 몇 명 되지도 않는 회사가 무슨 영어 닉네임을 쓰는 건지 마는 건지 자기 밑에 몇 명이나 있다고 희한한 직급 주렁주렁 달아놓고 - 비교적 직급이나 나이가 어린 Da 님이나 Is 님, Sm 님한테 말할 때만 순간 표정이랑 말투가 아주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처럼 변하는 인간들 보면서 -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서 '너 안 쪽팔려?'라고 하고 싶을 때도 많았고(무슨 자기들 머슴인 줄 아나). 그러면서도 Da 님, Is 님과 비슷한 직급 나이인 Bx 님한테는 설설 기어다닌다. 왜? Bx 님은 고려대 나와서? 업무 평가 이상하게 나올까봐? 딱히 Bx 님을 평가절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새로 들어온 Ji 님이나 Ro 님이 사업 기획 하는 거 보면 누가 더 경험 많고 능력이 잘 다듬어졌는지, 누가 우물안 개구리인지 사이즈 안 나오나? 바깥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데 - 지금 이 멤버들에 더해 전문가들 더 데려와도 신사업 될까말까 뻔히 살얼음판인데 - 어설프게 대접받고 싶어하고, 행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끌고가는 조직 문화 참 감춰지지가 않는다고.
일이란 것도 우습다. 서로 계급장 바꿔달고 - 내가 당신 잘하나 못하나 지켜보면서 하나하나 제대로 지적해 볼까 - 감당 못하고 눈물 짤 게 누군지 뻔히 보이는데. 천만 다행인 게 - 형상관리 툴과 코드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까고 말해서 - 내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치자. 그렇다고 지금 회사 코드 꼬라지, 서비스 꼬라지가 감춰지나? 이거 지금까지 이 꼴로 운영해온 당신들은 일을 얼마나 똑바로 잘했는가? 외부에서 진짜 IT 컨설턴트 모셔와서 - 지금 이 직급에 이 돈 받고 일해도 충분한 사람들인지 검증해 볼까? 보니까 DB에 자부심 가지시는 것 같던데, 다들 경력이 얼마나 되신다더라? 8년? 10년? 15년? 회사 근처의 항공사나 중대형 쇼핑몰 DBA 3년 경력 데려오면 그 사람보다 더 잘하실 수 있겠어요? 생각하다 보면 정말 끝도없이 화가 치밀기도 하고. 이제부터 나도 사람 돌변해서 똑같이 해줄까? 이 사람은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 뒤에서 씹어줄까? 나도 일하다 말고 또라이마냥 한숨 크게 쉬어줘? 사무실 흔들릴 정도로? 누가 뭘 잘못해서 회사가 어떻게 됐는지 리스트업 해둔 다음에 비교/대조 해볼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거 난 자신있는데? 당신들 입사 이후 지금까지 작업해온 것들 하나하나 다 뒤져보면서 촘촘하게 검증해봐도 되나?
실력. 관리능력. 인품. 셋 중 하나라도 특출나자. 제발. 정치력은 저 셋 중 하나라도 특출나게 갖춘 뒤에 발휘하자. 제발. 어느 직급의 누구든지간에. 당장 나부터라도 그렇게 하자. 지금 회사 출입구에 보면 붙어있다. 우리 회사는 '위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 위계에 맞춰서 에너지 억누르고 가면 쓰고 네네 제 잘못입니다 웃으면서 다니는 것도 하루이틀 - 이제는 결심이 선다. 나는 그냥 내가 발전하는 게 좋고, 나이먹는 게 두렵고 - 하고싶은 게 너무 많아서 하루하루 시간 아끼느라 죽겠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당신들은 누구지? 지금 이 상황은 뭐지? 그까짓 월급 몇 푼 들어오고 말고? 웃기지도 않아서. 차라리 건방진 게 낫다. 난 더 나은 환경에서 일 할 자격이 있고, 그렇게 될 수 있다. 한두 명, 두세 명 내 편 불려나가면서 - 남을 씹고 밟으면서 - 그렇게 버티고 올라가는 타입은 내 타입이 아니다(인생 즐겁게 살아야지 왜 서로 피곤하게 사나). 단지, 나와 맞지 않는 곳에서 시간낭비 하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을 뿐. 월요일에 가면 책상도 새로 와있고, 인테리어도 좀 돼있을텐데. 일단은 대표님께 면담 신청 해두었다. 지금 책상이랑 탕비실 인테리어가 문제가 아니다. 결단과 실천이 있느냐가 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