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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으로 매개된 착각의 장 속에서 - 네트로피를 녹이는 뜨거운 인식으로
생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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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9. 4. 19:03 일지/해외여행

 5일차. 조금씩 비가 내려서 습도가 상당히 높았지만 더위는 조금 주춤했던 날. 오전부터 배가 고파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전날 친구에게 추천받았던 이치란 라멘(신주쿠)을 방문했다. 다행이 줄이 전날 봤던 것처럼 바깥까지 길게 늘어있진 않았으나, 어쨌든 자판기에서 식권을 구입한 후에도 꽤 기다려서 들어가야 했다. 줄을 서있는 동안 음식의 세부사항 - 매콤한 정도라던가 면의 쫄깃한 정도 등등을 골라서 점원에게 제출했다. 이후 칸막이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독서실 부스 같은 곳에 앉아있으니 점원이 완성된 라멘을 정면에서 내어준 후 정면의 대나무 발을 내려주었다. 와이프와 나 사이의 칸막이를 접지 않았다면 완벽하게 누구의 눈치도, 방해도 받지 않는 사적인 공간이 생기는 셈이었다. 벌써 음식의 주문 단계에서부터 개개인의 취향에 맞는 주문을 받지 않았던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나라다웠다. 이후 국물을 한 번 떠먹은 뒤 와이프와 함께 깜짝 놀라버렸다. 국물의 깊이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국물의 깊이가 담보되니까 - 그 위에 쫄깃한 면을 넣든, 푸석한 면을 넣든 - 맵게 하든, 느끼하게 하든, 어떻게 하든 근본 없는 맛이 나올 일은 없겠지 싶었다. 이치란 라멘이 뭔가 베이직한 라멘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는데, 어떤 평가를 내리든 일단 내 혓바닥은 대만족을 외쳤다.

 신주쿠 가부키초 호텔과 신주쿠 역(교통의 중심지 느낌)을 기점으로 여기저기 다닌지 4일이나 되었는데, 이제 좀 헷갈리지 않고 잘 다닐 수 있겠다 싶은 시점에 또다시 신주쿠 역에서 좀 헤매고 말았다. 왜 일본사람들도 헷갈려하는 신주쿠 역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철도 회사마다 자기들만의 사적인 영역을 구분해놓은 덕분이겠지. 

 첫 행선지는 구단시타 역의 키타노마루 공원. 먼저 일본의 무도관(부도칸)이 보고 싶었다. TV로 격투기 행사를 볼 때 봤던 그 무도관. 한국의 국기원에 해당하는 곳. 검도인들이 각자의 검을 가지고 북적북적 몰려서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2000년대 중후반 한국 격투기가 침체였을 때 한국의 많은 파이터들이 일본에서 활동했었는데, 그만큼 무(武)를 중요시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았다. 검도 뿐이랴. 유도와 가라데를 배우는 사람들도 무도관이 얼마나 친숙할까. 이후 무도관을 거쳐서 과학기술관을 지나 히가시 교엔으로 이동했다. 커다란 해자(연꽃잎으로 온통 뒤덮인)를 건너 불타 없어진 성의 성터와 아름답게 꾸민 공원, 정원, 호수 등등.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본인들이 작고 좁게 쓰며 아낀 공간들을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된 - 통 큰 녹지로 잘 활용한다는 느낌이었다. 넓은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았으나, 아쉽게도 고쿄와 궁중삼전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긴자로 향했다.

 긴자의 쇼핑 거리는 볼까말까 고민했던 곳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신주쿠 이세탄 백화점 앞 북적이는 도로도 인상적이었지만, 긴자의 주말은 차도를 모두 막고 사람들만 다니게 해두었는데 - 높다란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각종 명품샵과 패션 상점, 기기 상점 등등을 품고 있었다. 한국에 대입해 보자면, 압구정동과 청담동을 그대로 합친 후 상권이 대활황인 상태로 5~10년 정도 더 발전하면 이런 느낌이 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수많은 관광객들도 관광객들이지만 역시나 한국의 세 배에 육박하는 인구 - 확실히 이 사람들이 인도만으로 다니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그러니까 차도를 막고 길을 열었겠지).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들은 유럽식 복장을 즐겨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귀족 느낌인가), 특히 노인들이 신사적으로 잘 차려입고 다니는 게 놀라웠다. 내가 복장에 크게 신경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질구질한 옷이나 등산복 차림으로 다니는 노인들만 보다가 - 꼭 비싸고 화려한 옷이 아니더라도 - 단정하게 차려입고 손수건을 챙긴 그들의 모습이 뇌리에 남았다.

 긴자에서 벗어나 아키하바라까지 걸었다. 슬슬 취미 상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메이드 카페 홍보 모델들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와이프와 함께 간식으로 - 한국 길거리에서 파는 것 말고 - 진짜 일본의 푸짐한 타코야키도 사먹어 보았다. 이런저런 상점들을 하염없이 둘러보며 체력을 불태웠다. 동생이 좋아했던 버스와 기차 모형 상점들도 많았고, 어렸을 때 플레이 했던 에로게 상점들도 있었다(천사들의 오후와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 그리고 앨리스소프트의 작품들이 기억난다). TCG 게임장이 눈에 띄었는데, 뭔가 행동은 서투르지만 카드 컬렉션 만큼은 혼모노였던 사람이 인상적. 사실 TCG가 흥하려면 이렇게 잘 마련된 친목의 장, 오프라인 게임장이 필요한데 - 역시 아키하바라는 세계적인 중심지이니 잘 발달이 되어있을 수밖에. 세가 빌딩 안의 게임기들은 입력 디바이스 종류가 상당히 다양했다. 단순히 카드를 올려놓는 것 이상의 경험을 추구하는 듯했다. 실물 카드를 들고 다니며 이렇게 사람의 눈과 귀를 홀리는 멋진 기기를 통해서 혹은 살아 숨쉬는 앞 사람과 직접 대전할 수 있는데 그깟 조그마한 휴대폰 화면이 눈에 들어올까 싶었다. 일본을 잘라파고스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세상 안에서는 충분히 즐길거리가 발달되어 있었다. 에로망가 상점에선 서양인 부부가 뭔가 자기들 기준으론 너무 희한하다는 듯 웃고 있었는데, 이렇게 일본인들 처럼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룰을 지키고 - 어제 저녁 식당에서 봤듯 절도를 유지하려면 정신적인 피곤함을 풀 수 있는 사적인 영역도 분명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크가 트롤을 강간하는 만화든, 문어가 정어리로 자위하는 만화든 뭐든 -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그 사사로운 발상의 자유가 무슨 문제겠나. 물론 그 서양인 부부의 기준에선 우스웠겠지만. 엠스타워라는 성인용품점도 둘러봤는데, 생각보다 통로가 너무 비좁아서 고생했다. 나오는 길에 인형뽑기 기계 앞에서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진 청소년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인도인인 듯했는데, 동전 지갑에 동전이 엄청 두둑했다. 일본은 관광객들 상대로 돈 참 쉽게(?) 버는구나 싶었다(일단 유명 캐릭터가 많으니까).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신오쿠보 역의 돈키호테 상점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종합 마트였다. 멘토스 콜라맛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저녁은 요시노야 규동집에서 먹었는데, 와이프는 얇은 불고기 몇 개 올린 밥 무더기라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한국인 입장에선 큰 메리트를 느끼기 힘든 음식이었던 것 같다. 어김없이 편의점에 들려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을 사서 호텔로 복귀했다. 북적대는 신주쿠 중심 편의점에선 영어 잘하는 동남아 점원이 여전히 활약중이었고(관광객들 정말정말 많았다), 풍속점 앞의 흑인 형님들도 역시나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일본 AV에 나오는 흑인 형님들은 대체 어디에서 데려오는 걸까 궁금했는데, 뭔가 궁금증이 해소된 느낌이다).

posted by 생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