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하라주쿠 역에서 내려 메이지 신궁으로 향했다.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한 숲길을 따라 걸어들어갔는데, 아쉽게도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신궁은 보수공사중이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처마와 등(燈), 제사 지내는 사람의 복식 등을 구경하다가 옆길로 꺾었다. 숲 속을 계속 걷다 보니 햇빛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너른 잔디밭이 나왔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풍경 - 마치 서양인들이 너른 잔디밭에 비키니만 입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듯 - 그렇게 즐길 만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비키니를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아저씨 하나가 팬티만 입고 깔개 위에 누워있었는데 -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조금 더 걸어가니 무도장(武道場)과 궁도장(弓道場)이 보였는데, 외부인 출입 금지라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자라 가족이 목을 빼고 일광욕을 즐기는 호숫가 앞 숲냄새가 나는 곳에서 수련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다시 길게 돌아서 메이지 신궁을 나와 바로 옆 요요기 공원도 가보았다. 이렇게 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반팔과 긴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일본인들은 이런 더위를 어떻게 견딜까). 수많은 사람들이 동아리 모임도 하고, 소풍도 즐기고 - 일본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목격할 수 있는 까마귀들까지 신바람이 난다는 듯 총총거리고 있었다. 요요기 공원을 나와서는 역 앞 타케시타 거리도 구경했다. 곳곳의 숨은 상권들이 꽤나 활황인 느낌. 북적북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 온 매장인 '설빙' 앞에 줄줄이 줄을 서있었는데, 우리 부부는 이미 수요일에 맛 없는 빙수를 맛봤던 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에서 면 종류 음식도 많이 팔지만, 일본인들이 크레페도 많이 먹는 듯 크레페 매장도 많이 보였다. 녹차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다시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에는 일본의 모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커플과 저녁식사. 신주쿠 역 자체가 복잡하니 친구 커플이 우리가 찍어준 주소를 보고 호텔 앞까지 와주었다. 넷이 함께 신주쿠산초메 근처 무지 커피숍(무지가 커피숍도 하는 줄은 몰랐다)에서 음료를 한 잔씩 마신 후 - 예비 제수씨(?)가 예약해 두셨다는 흑돼지 샤부샤부 집으로 향했다(일본의 샤부샤부는 고급 음식에 속한다고 한다). 친구가 주문을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주문을 모두 마친 후 친구가 절도있게 '하이!'라고 하자 점원도 절도있게 '하이!'라고 하며 주문을 마쳐주었다. 마치 무도인들간의 대화 같았다(오쓰!). 코스요리를 들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다이바의 'Zepp Tokyo'는 공연장이라고 한다. AKB48 처럼 SKE48도 해당 지역에서 48명을 선발한 아이돌 그룹이라고. 그리고 우리 부부가 가보려고 했던 쓰키지 시장은 새벽 3~4시 쯤 가서 자리를 잡아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는 팁을 주었다. 그때그때 제대로 된 수산물을 가져와서 싱싱하게 회를 쳐 먹는 곳이라 점심 때 가면 제대로 문 연 곳도 없고, 있더라도 수산물이 별로일 거라고. 덕분에 쓰키지 시장 일정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도쿄에 대한 감상도 이야기 나누었는데, 도쿄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고 하니 일본의 47 도도부현 중에 도쿄도(東京都)만 도(都)를 쓰는 곳이라고 했다. 나리타 공항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알 수 있었다. 나리타 공항을 확장하려는 정부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투쟁이 아주 강렬해서, 결국엔 정부가 포기하고 하네다 공항을 다시 확장하고 있다고 - 나리타 공항에 내리기 전 하늘에서 봤던 풍경이 떠올랐다. 농민들 쉽게 보고 저렴한 땅에 밀고 들어가려다 실패한 모양인가 - 그래도 자기 나라의 농업을 존중해서 손해본 나라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술집은 신바시 역의 카라쓰모리를 추천해 주었고(일정상 가보진 못했다), 맥주는 같은 브랜드여도 각 지역의 공장 마다 맛이 달라서 입맛에 맞는 걸 마셔야 한다고(친구는 맥주 보다는 하이볼을 즐기는 듯했다). 라면은 이치란, 규동은 요시노야, 둘러볼 만한 쇼핑몰은 신오쿠보의 돈키호테 상점.
자연스레 음식 이야기로 깊게 들어가다 보니 일본의 가쓰오 국물과 한국의 멸치 국물 이야기가 나왔다. 확실히 가깝지만 다른 나라인 것 같았다. 한국이 멸치와 마늘이라면, 일본은 다랑어와 생강이라는 느낌인가? 멸치 잡는 기술이 일제시대에 한국에 들어왔다는데, 일본인들이 멸치를 즐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멸치가 비싸지니까). 김치 얘기도 나왔는데, 솔직히 나는 일본의 베니쇼우가도 좋아하기 때문에 우열의 문제는 아닌 듯. 와이프가 어렸을 때 잠깐 살았던 적산가옥 이야기에선 - 난방 시스템은 확실히 한국의 바닥 난방이 승리하는 것으로 결론. 깨끗한 길거리 이야기도 나왔는데, 신주쿠 길거리가 특히 더러운 편에 속한다는 게 어이없었다. 이정도면 진짜 양반인데. 예비 제수씨의 고향이 큐슈인데, 큐슈인들의 자부심(친구의 표현에 따르자면)에 비춰보자면 - 도쿄는 난폭한 도시라고 했다. 난폭? 부딪히면 바로 고개 숙이면서 스미마셍을 연발하고, 지하철에서 절대 전화 통화 안 하고, 수수해 보일 정도로 단정하고 보수적으로 입는 회사원들이 남에게 피해 안 주려는 인상을 팍팍 풍기는 도쿄 사람들이 난폭하다니? 그럼 서울 사람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친구와 결혼 후 한국에 살아보고 싶어하시는 예비 제수씨에게 한국은 더욱 조심하시는 게 좋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내가 매국/사대주의로 자국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실제 인상이 그렇다 - 그들의 혼네가 어떻든 일단 겉으로라도 서로 조심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쾌적한지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 - 물론 그들만의 정치와 사회체제 속에서의 삶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더운 열기를 참으며 샤부샤부를 열심히 조리해 주신 예비 제수씨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는 신오쿠보의 한국식 디저트 카페. 한국식 디저트 카페가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하라주쿠 역의 '설빙'에서 한 번 확인했고, 저녁에 신오쿠보에서 다시 확인했다. 물론 한국 인구의 거의 세 배에 육박하는 일본 인구가 연출해내는 상권 활황의 열기가 어딘들 뜨겁지 않을까 - 그래도 카페 전국(戰國)시대가 열렸던 한국 나름의 노하우가 있겠거니. 카페에서 친구가 추천해준 켄트 스파크를 한 대 피운 뒤에(친구의 '글로'는 옥수수 찐 냄새가 났다) 모두 함께 거리로 나와 한국 식품점을 둘러본 후(예비 제수씨가 한국을 좋아해 주셔서) 신주쿠 역에서 즐겁게 헤어졌다. 친구가 일본으로 유학갈 준비를 하던 시절, 친구 방에 들어갔을 때의 생각이 났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한 장면 처럼 온 방안이 - 일본에서 쓰는 한자를 적은 포스트잇으로 말 그대로 '도배'가 되어있었던 장면. 내가 무언가에 그렇게 활활 불타올랐던 적이 있었나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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