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 본적이란 개념은 아직도 익숙치가 않다. 나의 고향이라 부를 만한 곳은 서울 개포동인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이 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고, 당연히 갈수록 본적의 개념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종손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내 집 아니면 다 남의 집인데 - 남의 집 종손이라고 어디 월급 더 챙겨주고 지하철 자리 비켜주기라도 하던가. 되려 종손 운운하며 폼잡는 집은 여자들의 기피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적/종손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고, 약하게나마 내게 심어져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고향 마을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나 친척들이 네가 그 집 종손이냐며 무언가 중요한 사람 취급을 해줬었고, 할아버지로부터 과하다 싶은 정도의 편애를 받았으며, 명절 땐 제사 지낸다고 군 내 이집저집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 연구가들이 족보의 허망함과 거짓됨에 더해 거슬러 올라간 남의 조상이 결국 내 조상임을 주장하는 세상 - 너도나도 윗대 누군가는 다 천석집, 만석집이었다고 하더라는. 전근대 사회가 끝난지가 언제인데 누군들 뭔들 어떻겠나. 딱히 별스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만나본 일도 없는 윗대 누군가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이야기가 있다 한다면 누구든 그것에 흥미를 갖게 되지 않겠는가. 사실 조상 누군가가 남겨놓은 이야기라 해봤자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인 즉 보나마나 '해라', '마라', '해라마라'의 세 가지 형태 중 하나겠지만 말이다.
본적지에 있던 한옥은 할아버지께서 직접 허무셨고, 대숲과 맞닿은 터도 이제는 우리 터가 아니다.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시원하게 몰락했고(아버지께서는 흥망성쇠는 자연의 이치이니 절대 누군가를 탓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별채 하나가 남았다. 그 별채 현판에 삼사재라고 씌여있다. 몇 번 오가면서도 별 관심은 없었다. 어째 이 낡은 건물 하나가 용케 남았구나 - 면우 선생의 제자셨던 고조할아버지께서 지으신 서당이라고 이야기 들을 뿐이었다. 그러다 작년엔가 아버지께서 삼사재의 삼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해 주신 일이 있었다.
삼사. 간단하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가치들이었다. 동용모. 정안색. 출사기. 용모를 똑바로, 낯빛을 똑바로, 말을 똑바로. 다산 선생이 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실렸던 가치들이기도 하다. 특히 용모에 관해서는 - 버선 코가 좌우로 똑같지 않으면 그자리에서 참칼이라 불리는 단검을 꺼내 쭉쭉 찢으시고 누가 바느질을 했느냐고 물어보셨다는 고조할아버지의 일화 - 의복에 문제가 있으면 사람이 자격지심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나비효과 되어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였다(다행히 며느리의 바느질엔 흡족해 하셨고, 삯바느질에 맡긴 결과물에 불만이 있으셨다고 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좋은 말 듣고 새기는 것이야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일상을 살다 보면 자연스레 그 가치들을 잊게 마련이니.
그러다 얼마 전 아버지께서 잠시 삼사재에 들르신 일이 있으셨는지 현판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신 일이 있었다. 그 현판 사진을 보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현판 옆에 긴 편액까지 곁들여 삼사재를 지은 이유를 설명해 두셨는데(서예가에게 부탁도 하셨을 것이고) - 이게 오늘날의 나에게까지 와 닿았으니 그 이유는 아직도 살아있는 것. 혼란한 시대, 호를 곡은(谷隱)으로 지으셨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후대에까지 전하고 싶으셨던 걸까. 정확히 무슨 말들인가 궁금해졌다. 나름대로 삼사의 의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먼저 다산 선생의 편지 내용을 봤다. 그 아들에게 동용모, 정안색, 출사기를 공부하기 전의 자세로 - 그리고 사원폭만, 사원비배, 사근신 - 을 공부할 때의 기준으로 삼으라 당부하는 내용이다. 동용모, 정안색, 출사기에는 보이지 않던, 사(斯)가 포함된 구절들이 나오니 조금 더 찾아볼 욕심이 생겼다.
논어 태백편에 실렸다는 원문을 찾아봤다. 방학때면 아침잠을 푹 자야 하는 어린이를 억지로 깨워 새벽부터 먹을 갈라고 시키시던 할아버지의 욕심과는 다르게 나는 체계적으로 한문을 익히진 못했다. 더듬더듬 아는 건 알고, 모르는 건 모른다. 원문만 가지고는 도통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해당 내용을 문법적으로 풀어놓은 해설을 봤다. 조금 다른 해석이다. 동용모로 다른 사람의 폭만(난폭하고 태만함)을 멀리할 수 있고, 정안색으로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출사기로 다른 사람의 비배(비패함)를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것은 증자라는 사람이 노년에 이르러 군자의 처세법을 풀어놓은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삼사의 가치를 풀어놓기에 앞서 새가 죽음에 이를 때와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를 언급해둔 바 있으니 맥락상 부드러워 보였다.
해석 관련해서는 주자와 정자의 견해 차이를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정자는 또 조금 다른 견해를 내어놓고 있다. 도올 선생이 따로 언급하신 게 있는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쪽 편액에는 주자(朱子)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 아마 고조할아버지께서는 주자의 견해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아쉽게도 편액 전체의 내용을 해석하려 들기엔 당장의 여유가 없다.
한편으로 용모는 사람의 행동거지라는 뜻도 있고, 얼굴 모양이라는 뜻도 있다. 하지만 안색이라 하여 낯빛 관련해 따로 단어가 언급되니, 여기서의 용모란 행동거지를 뜻하는 쪽인 것 같다. 결론은 - "행동거지를 바로 하여 폭만을 멀리 하고, 낯빛을 바로 하여 신실함을 가까이 하고, 말을 바로 하여 비루하거나 어긋남이 없게 하라." - 가 아닐까.
버선코와 참칼의 일화와는 다르게 아무래도 복장 관련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뜯어지거나 지저분한 옷만 아니면 복장이 무슨 상관이랴. 행동거지와 낯빛과 말 꺼냄이 중요한 것이라고. 더해서 해석 또한 어느쪽인들 어떠랴. 결론은 모두가 재(齋)를 향하고 있으니 - 이 세 가지 것(三斯)으로 정진(齋)하라는 말이다.
시대는 변했고, 변해간다. 해당 군청에서 기와 새로 하라고 돈도 보태준 모양이지만 아버지께서는 삼사재를 돌보고 지키는 것은 아버지 대까지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나 역시 꼭 본적지에 그 무언가가 남아서 후대가 계속 그곳에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네이버에 치면 나오는 김녕김씨의 삼사재도 있고, 또 전국 어딘가 다른 집의 삼사재가 있을 수도 있다. 맥락은 모르겠으나 원문의 증자 또한 그 기물 돌봄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가끔씩 꺼내보시던 녹슨 장검도, 말 안장도, 기타등등도 - 담겨있던 궤짝 모두 도(盜) 선생이 들고 가버렸다. 물건은 없어져도 된다. 녹슬고 낡은 것들 가지고 뭐 할 게 있다고. 단지, 삼사의 가치는 언제든 나를 반성케 하는 가치들이고 - 또한 내 아이들도 삼사가 몸에 밴 아이들로 커줬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삼사재는 스러져 없어질 수 있겠지만 옛 유학자들이 남겨놓은 삼사의 가치는 또 다른 여러 형태로서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여유가 되면, 편액도 한 번 천천히 살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