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가정용 전기 누진세 때문에 에어컨은 너무 더울 때만 잠시 켰다 끄게 되는 요즘. 정부와 한전의 공허한 변명은 그냥 그런 변명대로 두고, 당장 어찌할 힘 없는 일반 가정에서 믿을 구석이란 선풍기 뿐. 선풍기 두 대를 가졌지만 한 대는 고장이 나서 나머지 한 대만 가지고 열심히 여름을 나고 있다. 현 회사에 취업하던 해 여름 하이마트에서 70만원에 육박하는 돈을 지불하고 산 다이슨 선풍기 - 혁신적인 발상 자체의 세련됨, 미려한 색감과 디자인 - 하지만 구입 후 쓰다 보니 결국 얻은 것이라곤 더럽게 큰 소음과 상대적으로 매우 약한 바람, 잔고장, 하청인 동양매직 AS센터의 비싼 부품값이었다. 머리쪽 팬 부분 접합 부위 플라스틱 부러진 게 15만원이라는데, 그 돈 내고 고칠 엄두는 나지 않아 다른 잔고장까지 그냥 껴안은 채 제트 엔진의 굉음을 내뿜는 바람 대포로만 가끔 활용하는 중이다(볼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다른 한 대는 신일 선풍기인데, 못미더운 다이슨 제품으로 다시는 모험하지 말자고 - 그래도 선풍기는 신일이 메이커 아니냐며 - 올해 5월 말 쯤 하이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이다. 이게 어제 저녁에 고장이 났다. 리모컨까지 있는 제품이라고 나름 10만 원 넘게 주고 산 선풍기인데, 3단만 틀면 모터가 멈춰버리는 것이다. 아니, 3개월도 안 돼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신일 AS센터 전화해서 지역 고르고 기다려 보니 불친절한 아저씨 하나가 직접 가지고 와봐야 안다고 - 해서 마침 휴가인 김에 위치 물어보고 찾아갔다. 찾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선풍기 세워두고 앉아 있는 걸 본 어느 아저씨 하나가 말 걸더라. 혹시 신일 찾아 가느냐고, 자기도 선풍기 고치러 가는 길이라고. 길동무 달고 신일 AS 센터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저마다의 고장난 선풍기를 들고 줄지어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증상을 설명하고 견적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인터넷에서 산 거 아니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이마트에서 샀다고 했더니 그럼 하이마트로 가져가서 고쳐야 된다고 하는데, 대체 이럴 거면 뭐하러 가지고 와보라는 소릴 한 건지. 생각보다 전체적인 불량인 것 같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잠시간 길동무 했던 아저씨 왈 - 자기가 하이마트에서 일해봐서 아는데, 하이마트로 들어오는 물건들은 일반 정식 물건들과는 조금 다른 일련번호를 가진 물건들이 들어온단다. 오프라인 매장이라고 너무 믿지 말라는 이야기도 곁들여서. 어이가 없었다. 하이마트에 전화해 보니 방문접수, 방문수령 원칙으로 수리 완료까지 15일은 걸릴 거란다. 신일 정식 AS도 안 되는 물건, 3개월 미만에 바로 고장나는 물건, 한여름에 15일이나 기다려야 되는 물건 - 신일 잘못인가, 하이마트 잘못인가? 사용설명서를 낱낱이 읽어봐도 내가 잘못 사용한 부분은 없는 것 같은데.
며칠 전 와이프 컨디션 안정을 위해 서울역에서 집까지 택시를 탄 일이 있었다. 차 굴리고 다닐 재력이 못 되다 보니 택시비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어 평소에는 뚜벅이 신세인지라 상당히 오랜만에 탄 택시였다. 탑승 후 목적지를 댔더니 잘 모르겠단다. 네비 찍으시라 했더니 나보고 직접 찍어달라고 건네주길래 길안내 버튼까지 눌러서 줬다. 경인고속도로 타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여서. 그런데 계속 가다 보니 네비가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라고 뱉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경인고속도로는 탈 생각도 않고. 꼴에 나와 와이프 광분하는 꼴은 보기 싫었는지 자기는 정말 지리를 모른다며 요리조리 미안하다는 듯 잘도 피해간다. 결국 출발지에서 한 번 빙 돌고, 도착지 부근에서 또 한 번 빙 돌아서 5천 원이 더 나왔다. 나이 지긋한 개인택시 기사가 서울 지리도 모르고, 네비가 안내하는 길 그대로 따라갈 줄도 몰라서 경로를 네다섯 번이나 이탈한다? 우리 부부 정도는 자기 깜냥으로 충분히 속여먹고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 불편 신고라도 넣을까 해서 번호판과 이름을 적어뒀으나 결국 불편 신고는 와이프가 말렸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치열하게 불편 신고까지 챙기려는 사람이 된 걸까.
얼마 전에는 국민은행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 체크카드 SMS 알림을 또 해지한 일이 있었다. 분명히 지난달에 전화해서 길길이 날뛴 결과 - 그동안 청구된 요금 모두 돌려받고 SMS 알림 해지까지 해놨건만 - SMS 알림 요금을 빼가겠다는 연락이 또 왔기 때문이었다. 이번 건에 대해 상담사 분 이야기를 들어 보니 지난달 통화 후 이틀 뒤에 자기들도 모르는 전산상의 처리가 또 이뤄진 부분이 있었단다. 차분히 이야기 나누며 해지 확인한 뒤 끊었다. 나는 왜 또 이런 일로 전화기 붙잡고 시간 낭비를 해야 했을까. 지난달에 길길이 날뛰었던 이유는 마일리지로 알림 요금 빼갈 땐 가만히 잠수해 있다가, 마일리지 모두 소모 후 현금 빼가기로 전환할 때만 어쩔 수 없이 알려주긴 해야겠다는 는 듯 통보식으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동의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돈 빼간다는 통보가 오면 세상 어느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거기에 더해 원래 해지 신청할 때는 나의 큰 목청을 십분 활용해 전투 모드로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해둔다. 해지 방해를 위해 - 상담사들을 고객 응대 전문가가 아닌 메뉴얼만 되뇌이는 앵무새로 만드는 - 조직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고객이 말하는 내용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무시하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메뉴얼만 되뇌이는 상담사가 내게 꼭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듯, 나 또한 인간 앵무새에게 꼭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날뛰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려니.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면 해지 방지용 메뉴얼을 작성하는 관리급, 그리고 그 관리급을 압박하고 있는 해당 조직의 임원급에게 있다. 물론 아주 안 좋은 감정이다.
삼성 냉장고를 수리했다. AS 센터에서는 토요일 3시에 온다고 했는데, 5시가 넘어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모양이라고 포기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려는데 기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냉장고 뜯어보더니 댐퍼가 나갔다며 9만 원 가량을 불렀다가, 와이프가 하도 뭐라 하니까 팀장 재량으로 깎았다며 7만 원에 못 미치는 돈에 해줬다. 삼성은 그냥 부품만 하청업체에 내려보낼 뿐이고, 부풀려 남겨먹는 건 오로지 하청업체의 재량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다용도실에 쌩쌩 돌아가는 금성 냉장고(장모님이 물려준 - LG가 아닌 금성)는 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자기 몫을 다하고 있는데, 왜 2년 반 사용한 냉장고가 해까닥 돌아버린 것일까. 더 복잡한 기술들이 집약되기 시작해서 그런 것일까? 웃기는 소리다. 댐퍼에 뭐 그리 세밀하게 집약된 기술이 들어갔다고. 삼성 서비스에는 또 안 좋은 기억이 있다. TV 구입할 때 돈은 이미 입금을 해놨는데, 오면 언제 오겠다는 게 감감 무소식인데다가 댓글 보니 설치비로 난리친 집들도 있었던 것 같아 불안했던 기억. 인터넷에서 구입한 죄로 - 하청업체가 개념이 있는 업체인가 아닌가 - 뽑기를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복잡한 사정 내가 어찌 다 알겠냐만 자기네 업체가 삼성 정식 서비스 센터라는데, 삼성을 욕할 수밖에. LG는 이런 면에선 깔끔했었다. 오면 언제 오겠다 정확히 연락 주면서 깔끔하게 처리하고 갔다. 하지만 LG는 다른 쪽에서 결국 브랜드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는데 - TV 구입 전 오프라인 매장 구경 다닐 때 - LG 매장 영업사원이 싸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자꾸 상조 가입을 권유하던 것. 기가 탁 막히더라. TV 공부를 더 하던가, 다른 브랜드와 비교해 어떤 장점을 어필할 것인지를 더 연구하던가. 관리자에게 상조 가입 실적이나 압박받는 인간들에게 뭘 기대하겠나 싶어서 기분 잡친 상태로 매장을 나왔던 일이 있었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두 곳이 이런 수준인데 - 아무리 예전 같은 철통 AS가 기업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라지만, 아무리 오프라인 매장의 메리트가 사라져가는 시대라지만 - 브랜드의 품위까지 내던지는 행위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제는 '브랜드'가 떡 하니 찍혀 있어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지난 겨울 와이프와 함께 핸드폰을 새로 바꿀 때의 일이다. 동네에 새로 생긴 폰 판매점이 있어 왔다갔다하며 몇 번 상담했는데, 폰 파시는 분이 옆 판매점 욕을 하면서 자기는 정말 신뢰만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름 그럴싸 해서, 옆 판매점에서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냥 새로 생긴 판매점에서 - 인터넷 결합에 온가족 결합까지 해서 구입을 했다. 물론 지원금은 나라에서 정해놨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가정집은 페이백이라도 받는 게 좋으니 - 페이백도 약속 받았고(물론 페이백은 엄연한 위법이다). 하지만 계약 시작부터 말썽이었다. 내가 출근한 사이 와이프가 가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왔는데, 사인 먼저 받아놓고 나중에 자기들 마음대로 부가서비스 항목을 기입한 것이었다. 그놈의 신뢰 신뢰 외치던 사람이 저지른 행위여서 더욱 배신감이 컸고, 가서 따졌었다. 우리도 페이백까지 고려해서 조금이라도 이익 보려고 큰 위약금 감안해 가면서 계약한 건데, 앞으로의 일까지 믿을 수 있겠느냐고. 위약금 액수가 꽤 커서 페이백 없으면 그대로 몇 십 만 원을 뒤집어 쓸 상황 -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계약을 해지하지는 않고 그대로 가긴 가되, 위험 방지를 위한 유사 사례들을 조사해봤는데 - 결과가 너무나 암담했다. 폰 파시는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손에 꼽힐 만큼 험한 쪽이 이쪽이어서 그 수법이나 피해 사례가 상상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죄를 크게 묻기엔 애매한 액수들이라 판이 아주 지저분하다). 조사 후의 불안감은 그 뒤에 펼쳐질 일의 전조였다. 페이백을 약속한 사람에게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고, 해당 판매점에 가서 물어보면 계속 그 사람은 다른 매장으로 갔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와이프와 상의해서 선제 대응하기로 하고 해당 매장에 자주 방문해서 얼굴도장을 찍었다. 대충 하다가 가게 접고 도망갈 거냐고. 이런 식으로 신뢰감 없이 연락 피하면서 일할 거냐고. 결국 페이백 약속 날 밤 11시 반에, 약속된 돈의 절반을 받았다. 그리고 그 폰 파시던 분을 계속해서 열심히 다독여 드린 끝에 기한이 지난 바로 그 다음 날 오후에 나머지 절반을 마저 받았다. 계약서에 적힌 약속 날 오후 6시 전에 깔끔하게 전액 입금해줄 거라던 그 자신만만한 신뢰의 사나이도 사실은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덩치 큰 통신 카르텔들이 폰 판매점들을 관리하는 방식이 뻔히 있으니 - 최전선에서 폰 파시는 분들도 결국에는 잘못된 걸 알면서도 - 혹시라도 속아주면 내 숨통이 트이겠다 싶어 고객을 상대로 한 번, 두 번 비틀게 되는 것이리라.
결혼 반지도 한바탕 홍역을 치렀었다. 종로 귀금속 상가 여기저기 돌다가 와이프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J 사에 있다길래 삼색 디자인으로 사이즈 재고, 날짜 정해서 계약서 썼는데 - 당일날 받아 보니 와이프 반지는 삼색이 아니었다. 어째 내 반지는 사이즈가 좀 큰 것 같고 해서 전화해 보니 가지고 오라길래 결혼 후에 다시 맡겼다. 내 반지는 반인치 줄여서 새로 하기로 하고, 와이프 반지는 삼색 디자인에 같은 사이즈로 새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받아 보니 와이프 반지는 사이즈가 작아서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고, 내 반지는 반인치 줄여서 새로 만들기는 커녕 살짝 덧대 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와이프 반지는 감정서도 빠져있는 상태. 각자 이니셜과 결혼일 까지 새겨서 정해진 날짜에 계약대로 해주겠다는 계약서상의 문구는 애초에 공허한 잉크에 불과했던 것. 결혼 후 와이프가 속상해서 처음으로 운 이유가 바로 이 결혼반지가 애먹여서였다. 솔직한 심정으론 대형 물통에 휘발유 가득 담아 매장으로 찾아가서 그 사장이란 인간에게 뿌리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가 - 서로 일 주고받는 관계에선 가능한한 얌전하게 구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 글쎄, 헐크가 평소에 온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어쨌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는데 뭐 어쩌겠나. 우여곡절 끝에 비정상을 정상화 시킨 후 잘 끼고 다닌다.
작년에 신설동을 지나다 수제 가죽신발을 파는 곳이라 써붙여 놓은 곳이 보여서 - 마침 새 신발이 필요했던 터라 두 켤레 구입했다. 주인 말로는 송아지 가죽이라 아주 부드러운데다가 원하는 디자인에 원하는 밑창까지 선택하는 대로 붙여주겠다고 해서 원하는 디자인에 밑창까지 골라 주문했다. 30만원 미만으로 두 켤레 샀으니 싸다면 싸고, 비싸다면 비싼 돈이었다. 시간이 한참 걸려서야 택배가 왔는데 - 웬걸, 집에 온 택배를 열어보니 한 켤레만 똑바로 왔고, 송아지 가죽은 커녕 이상한 천때기 신발이 또 한 켤레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와이프가 놀라 그쪽에 전화해 보니 - 젊은 사람에게 좀 더 어울릴 것 같은 걸로 보내준 거라고, 그것도 좋은 신발이라고 - 혹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해서 그랬나 - 이게 무슨 몰래카메라 찍는 것도 아니고. 카메라 어딨나 두리번두리번 찾아보는 쪽이 그나마 황당함이 덜할까 싶었다. 미쳐도 보통 미치지 않고서야. 주인과 통화 및 문자 주고받으며 - 신발 가지고 원한 쌓을 일 있냐는 말까지 내뱉으며 다독인 끝에 - 왕복 택배비까지 그쪽 부담으로 합의해서(이것도 그쪽 부담이 당연한 건데) 결국 원래 디자인대로 물건을 받았다. 뜬금없이 송아지를 끌어들여 신발 팔아보려 침 튀기던 노인 - 나름 송아지 이야기 꺼낼 때의 그 순진한 눈망울 만큼은 대단했었다고. 쥐 같은 관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그 송아지 가죽신발은 얼마 신지도 않았는데 옆부분 박음선 쪽이 타졌다. 뭐 그래도 티는 잘 안 나니 열심히 신고 다닌다.
어디 위에 나열한 에피소드들 뿐이랴. 인터넷 장터의 최저가 낚시부터 시작해서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 파시는 분들의 위용, 한국식 액티브X 결제 시스템의 기생충들 - 그래도 여기까진 그나마 양반이지 - 집이나 차 같은 재산 계약으로 들어가면 또 몇 수 위의 천하 협잡꾼이 모여 활약하고 있을지니 - 세상이 참으로 험하긴 험하구나. 큰 걸 바라는 게 아닌데. 기본만 지켜주면 되는데. 이 기본이야 말로 정말 크고 힘든 것이라는, 수시로 깨닫는 진리. 순자 같은 고대 철학자가 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의 위선설을 주창한들 당대에도 열심히 말싸움만 하다 저세상으로 떨어졌는데. 유구한 세상사 엎어지고 뒤집어져온 과정에 어찌 협잡꾼들이 없었으랴 - 불신의 시대, 저신뢰 사회라는 타이틀은 꼭 오늘날의 것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몇 십 년 전엔 서로에게 정이라는 게 있었다고 열심히 주장하는 분들도 계신데, 내가 당대를 살아보진 않았으니 알 길 없다. 나 같은 일반 서민, 평범한 가정집 구성원들은 어떻게 정신 붙들고 갈피를 잡아야 좋을지 암담하다.
전원책 변호사의 피를 토하는 칼럼이 윗물을 논하고 있는데, 흘러내려오는 물 받아 마시는 우리 아랫사람들(?)은 이렇게 험한 세상 하루하루 살기도 지치네. 자본주의의 극한을 달리는 오늘을 살아감에 혹시 내가 돈이 많았다면 - 일본 놀러가서 튼튼하고 고급진 산요 선풍기 한 대 사왔을 것이고, 자가용 끌거나 모범택시 불렀을 것이고, 백화점표 프리미엄 전자제품을 사서 썼을 것이고, 오프라인 전자제품 매장에서 폰을 구입한 뒤 폰 판매점에는 개통만 하러 갔을 것이고, 반지도 더러운 꼴 안 보게 청담동 명품 매장에서 계약했을 것이고, 신발도 이탈리아에 가서 장인에게 부탁해 맞춰왔을 것이고. 역시 다 돈 때문인가 - 조금이라도 더 남겨먹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아껴보기 위해 - 상호 비틀고 비틀리는 지옥도. 누가 감히, 대체 어떤 방식으로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할 수 있을까.
그래도 아직(?) 우리 동네 시장에는 협잡꾼이 없는 것 같다. 솔직히 옆집도 본체만체 하는 상황에 이웃 타령하긴 간지럽지만, 옆집과도 안 하는 인사 물건 고르면서 한 번 씩 나누게 되고, 깍아본답시고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얼굴 도장 찍을수록 서로 함부로 하지 않는다. 인플레니 디플레니 개소리 떠들 필요도 없이 - 모두 모여 조금이라도 평범함에 가깝게 살아보려 애쓰는 사이 - 안 팔리면 가격을 낮추고, 올릴 때도 함부로 올리지 않는다. 그나마 피신할 수 있는 이 '섬' 같은 '동네'에서 - 어딘가에서 엄습해올 미래의 협잡꾼에 대비하면서 - 불안과 위협의 세계 속에서 잘도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하루에 얼마간은 고장난 신일 선풍기를 끄고 시원한 에어컨을 틀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