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테크 업계의 Q사. 임원 두 명과 면접. 어느정도 학벌이 되는 사람을 원하는 듯했다. 옛날에 내가 비슷한 업종의 사업을 구상했었다 하니 아이디어 물어보길래 썰을 좀 풀어줬더니 연신 좋은 생각이라고 해주었다. 내 인성이 마음에 드는데, 연봉을 깎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최종적으론 어차피 연락도 안 왔고, 왔더라도 내가 노가다판에 나갈지언정 몸값 깎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돈도 짜고 차비도 안 주면서 사람을 부르나. 짜증나게.
SMT 업계의 W사. 먼저 와있던 아저씨 두 명이 먼저 대화중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내 복장을 보면서 옆사람에게 양복 입고 오라고 돼있지 않았느냐고 수근대듯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양복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없는 걸 어쩌나. 남방이랑 정장 바지는 있는데, 아직 마이가 없어서. 그리고 옷 보고 거르는 회사면 면접 볼 필요도 없지 - 개발자 뽑는데 설마 옷 보고 거르겠나 싶었다. 역시나 옷 가지고는 별 말이 없었다(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1차는 종이 시험, 2차는 4대3 면접. 아무래도 SMT 업계에서 사용되는 기술을 경험해본 경력자나 비슷한 환경에서 일해본 사람을 우대하는 인상이었다. 3차는 인사팀 한 분과 1대3 면접. 3차 면접 때 야근이랑 출장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곧이곧대로 내 생각을 다 말해버렸다. 그냥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야근이 많으면 많다, 대신 야근수당은 잘 챙겨주겠다고 미리 써놓던가. 아니면 업계 특성상 출장이 있다고 미리 써놓던가. '몸바쳐서 일하겠습니다!'라고 할 기분이 아니었다. 사람 시간 다 뺏기게 왜 이러나. 이런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게임업계 벗어나서 IT쪽으로 넓게 보니 해외 출장 한 두달은 기본인 경우가 상당하고, 오히려 게임쪽에서 왔다니까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야근 잘하겠다고 희한한 기대감을 표시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고. 희망연봉 물어보길래 내 마지막 연봉 보다 높여 불렀다. 사측에선 2년 넘게 다녔던 과거의 G사 운운하면서 청소도 직접 해야 하는 그런 작은 회사에 잘도 붙어다녔다고, 우리 W사는 매출이 넘사벽이라고 자랑하던데 - 그럼 돈도 더 주지 않겠나 싶었다. 당연히 최종 연락은 오지 않았다.
W사의 면접 때 함께 했던 아저씨 중 한명이 최종 연봉협상 후 먼저 나간 상태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다른 아저씨까지 총 세명을 모아 잠시간 티 타임을 가지자고 했다(1층 커피숍). 그냥 이런저런 회사 정보나 업계 정보를 공유해보자는 자리였다.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아래, 한 명은 나보다 한 살 위. IT업계도 말이 개발자 채용이지 실상은 외국 현지(십중팔구 열악한)에 출장 내보낼 고객 대응팀 팀원이나 현장 영업팀 팀원을 뽑는 경우가 허다했다. 출장지가 국내 지방이면 그나마 다행인 거고. 개발 커리어 쌓는 줄 알고 들어갔다가 코드는 대충 겉핥기로만 좀 보다가 기술 영업으로 구르는 사람들. 안타까웠다. 차라리 속이지나 말지. 영업은 영업으로 알맞게 뽑으면 자부심 가지고 일할 사람들 많을텐데. 아저씨 하나는 게임업계에 관심은 많았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한 것 같길래 여러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대충 '아저씨가 N사에 이력서를 왜 내? 미쳤어? 나이랑 학벌을 생각하셔야지. 공채 그거 직종별로 2~3명 뽑긴 뽑나? 극히 드문 케이스가 있겠지만 그게 절대 아저씨는 아니야. 이건 확실해. 그리고 요새 경력자들도 길거리에서 손 빨고 있는데 지금 이 경력으로 어떻게 경력 입사를 하나. 포트폴리오 진짜 눈 튀어나오게 잘 만들었던 내가 아는 O 씨도 결국 나이 때문에 신입으로 입사 못하고 꿈을 접었구만.'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이렇게 착하고 열심인 청춘들을 앞에 두고 왜 사람 뽑는데 자기들의 업무 환경을 똑바로 안 써놓고, 자기들이 생각한 적정 몸값을 안 써놓는 건지 이해불가. 구직자들의 시간이 소중한 줄 모르는 개새끼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권 회사 혹은 접근성이 좋지 않은 위치의 회사 몇 군데에서 연락이 온 일들도 있었지만 면접을 모두 거절했다. 구로면 구로, 판교면 판교, 상암이면 상암 - 회사들이 몰려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헤드헌터들은 이력서 관련 이런저런 좋은 조언들을 많이 해주었으나, 결과적으로 별 영양가는 없었다.
조금은 먼 거리에 있었던 E사. 잡플래닛 평가를 보니 악평으로 가득했다. 크레딧잡에서 확인되는 이직률도 엄청났다. 무엇보다도 잡플래닛에 격주 토요일 근무라고 누군가 외쳐놓은 게 하이라이트였다. 당장 연락 왔던 전화번호로 문의 문자를 보냈다. 격주 토요일 근무 맞냐고. 맞다는 답변이 왔다. 면접 취소에 더해 취업 사이트에 신고를 넣었다. 주 40시간이라고 사기치고 있다고. 며칠 뒤에 답변이 왔다. 경고와 함께 조치를 취하도록 해두었다고.
서울 동쪽의 R사. 단기직이지만 대우는 잘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난 나름 오래 다닐 회사를 찾는 중이라 힘들겠다고 했다. 잡플래닛 평가를 봤다. 내부 직원들은 개처럼 굴리는데 - 프로젝트 컨트롤도 똑바로 못하면서 항상 발등에 불 떨어질 때마다 외부 단기인력들을 돈 많이주고 데려온다는 볼멘소리가 쓰여있었다. 마음속으로 R사 재직자분들께 힘내시라고 말씀드렸다.
역삼역의 T사. 전시/홍보 쪽에선 나름 유명한 곳인 듯했다. 하지만 크레딧잡 기준 이직률이 엄청났다. 면접을 봤다. 기술적으론 나와 잘 맞는 것 같았는데, 수습 기간 3개월은 급여가 70%라고 했다. 1년을 모두 채우면 빠졌던 30%를 모두 돌려준다는데, 면접관이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 '그런데~ 히힛! 1년을 버티실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데헷!'. 왜 웃지? 이게 웃긴 일인가? 어벙벙한 기분으로 회사 문을 나왔다. 뽑아놓은 사람들이 하도 도망가니까 수습 급여 줄여놓고 나중에 보상해주는 제도를 만들어야겠다는 잔대가리 굴릴 정신은 있으면서, 왜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는 환경을 만들 정신은 못갖췄을까? 이 회사는 1차 탈락 결과를 통보 받은 것 자체가 너무 기분 나빴다. 나 설마 이런 회사한테도 까인 거야?
청담동의 Y사. 면접관과의 일대일 면접내내 모든 것이 수월했다. 업무 강도는 좀 높을 수 있지만 회사 초기라 그렇다고 했고, 연봉도 내가 제시한 것보다 더 주겠다고 했으니 그냥 약속대로 출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용되는 기술들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찜찜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럴리가 없는데. 이렇게 쉬울리가 절대 없는데. 해당 그룹의 다른 계열사들 평을 찾아봤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 게 일상'이라는 이야기와 '주말 출근도 당연하다는 분위기'. 순간 면접관이 했던 말이 내 뒷통수에 푹 박혔다. Y사 대표가 그룹 오너의 아들이라는데 - 9월에 다닌 △사 생각이 덜컥 났다. 오너의 자식들은 대게 오너의 철학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어있다. 직원이란 그냥 돈 주고 일 시키면 되는 존재 아니냐는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박혀있을 가능성이 컸다. 면접관 왈 대표가 왜 주말에는 일 안 시키냐는 말을 하기도 했었는데 자기가 조금씩 바꿔 나가려 한다고. 아니, 다 떠나서 나는 주 40시간 기준으로 연봉을 말한 건데 - 면접관은 나를 주 60시간 기준으로 일을 시킬 예정이므로 양심상 돈을 더 올려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주 60시간으로 일할 거면 연봉도 1.5배가 되어야 하는데, 시급 가산까지 따지면 내 연봉은 바로 맨 앞자리가 올라갔어도 옛날에 올라갔어야 했다. 백 단위로 얼마 올라가는 건 되려 내 연봉이 깎이는 상황. 나중에 회사가 성장한 뒤에 보상? 지분 줄 거 아니면 죄다 웃기는 이야기다. 스톡옵션도 높은 확률로 휴지조각 - 스톡옵션 계약서가 무조건 행사자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종이와 볼펜에게 미안해 해야 한다고. 월요일 출근 취소라고 면접관께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왜 IT업종 사무실이 청담동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무슨 디자인/아트 업종이면 조금은 이해가 가겠는데. 대체 이 회사가 왜 청담동 한가운데에 있을까? 뭐, 교통이 좋다면 또 모르겠는데. 혹시 대표님 댁 바로 옆인가?
집에서 가까운 U사. 박사 명함을 가진 분께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게임업계 출신이냐고 물으시면서 '밤 잘새요?'를 아주 밝은 목소리로 연발하셨다. 출장 이야기도 나왔지만 나로서는 이미 캔슬한 회사도 있는데다가 앞으로 구직기간이 더 길어지면 문제가 될 수도 있기에 '회사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비굴한 답변으로 면접 보는 중간중간 내가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임원 한 분 더 오셔서 2대1 면접을 보기도 했고, 그자리에서 오너 면접을 일대일로 보기도 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불만이 뭐가 있었냐길래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고 해서 직접 청소하는 게 불만이었다고 했다. 할 때야 어차피 내가 할 일이니까 보람있게 하자고 마음먹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청소는 청소 노동자에게 맡기는 게 회사나 직원이나 서로 윈윈 아닌가. 하지만 나이 많으신 오너분은 살짝 버럭하셨다. 당연히 직원들이 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내 입장에선 오너분의 대답은 빵점짜리 대답이었다. 청소는 청소 노동자분께 맡기고 직원들에겐 회사 일에 집중하라고 배려해주는 모범 회사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런저런 난관을 뚫고 최종 합격되었고, 출근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와이프가 해외 출장 걱정을 하며 밤에 잠을 좀 뒤척이는 걸 보고 패를 접기로 했다. 솔직히 이대로 죽기엔 참 아까운 패였다. 이미 11월인 시점에 얼마나 더 면접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12월이 있다고 안심하기엔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시점. 하지만 회사가 중요한 만큼 가정도 소중한 법.
영상 관련 P사. 노트북으로 코딩 시험을 봤다. 인터넷 검색 키워드는 제한되어있었다(정답을 바로 찾지는 못하도록). 화면은 원격 팀뷰어로 보고 계신 듯했다. 문제를 모두 풀진 못했지만 4대1로 면접 보면서 여러가지 논의를 했다. 면접관 모두 나보다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30대로 젊어 보였고, 전부 개발자들이셨다. 회의실에도 이미 관련 기술 장비들이 들어서있었다. 회사가 참 안정돼보였고, 면접장에 들어오신 이 분들이 버티고 계서서 더욱 든든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크레딧잡에서 본 것처럼 인건비 지출이 높고 인력이 꽉 짜여진 기술 중심 회사였다. 아깝게 2차 면접 일정이 잡히진 않았지만 그건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한다. 신입/경력 구분 없이 뽑고 계신 듯했는데, 아무래도 좋은 분을 찾으셨겠지.
앱 개발 H사. iOS 네이티브 개발자를 찾는 것 같았다. 애플 키보드의 펑션 키랑 Xcode만 적응되면 Objective-C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는데 눈치를 보니 조금 더 어린 사람을 뽑고 싶어하는 듯했다. 뭐, 또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떨어졌는지 어쨌는지 나야 모를 일이지만. 인연이 아니면 말아야지.
집에서 매우 가까운 V사. 해당 업계에선 점유율 1위를 달리는 나름 탄탄한 곳. 개발팀 직책자 두 분과 2대1 면접. 필요한 부분만 요령있게 물어보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약 두 달 가량 짧고 굵게 면접 훈련이 되어있어서 이래저래 대답이 잘 나왔다. 업종 자체가 회사도 나도 모두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업종이었다(요즘 시기에 나쁘지 않은 업종).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최대한 어필했고, 감사하게도 2차 면접이 잡혔다.
또 집에서 매우 가까운 Z사. 층 전체가 Z사 영역이었다. 회사가 크고 안정된 만큼 내부에 카페테리아도 보였다. 여기는 U사에 출근할 결심 때문에 면접 참여가 힘들다고 했다가 U사에 대한 생각을 접으면서 부랴부랴 다시 전화해 면접 기회를 다시 달라고 했던 곳인데, 인사팀 담당자분은 좀 황당하셨을 수도 있겠다. 내가 조금 일찍 도착했던 터라 회의실에서 인사팀 담당자분과 10분 넘게 대화 나누다가 면접장에 들어섰다. 넓은 회의실 공간에 사장님이 정 중앙, 그리고 좌우로 넓게 떨어진 곳에 직책자 두 분이 앉아계셨다. 이렇게 거리를 넓게 벌리고 앉은 연출이 괜찮았다는 느낌. 정 중앙에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장님의 위엄이 돋보였달까. 1차와 2차 면접 모두 자신이 직접 사람을 살펴보겠다는 의지. 면접자의 실수가 있었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너그러움. 자기가 일궈놓은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정도로 키워놨는데 세상 누가 뭐라 하겠는가). 공학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스스로 공부해서 채우면 될 게 아니냐는 인재관. 위 네 가지가 확실히 엿보이는 멋진 사장님이셨다. 입사하게 되면 함께 일하게 될 팀의 책임자 분도 인상이 좋아보이셨다. 하지만 2차 면접은 다음주고, 동시에 진행중인 V사의 2차 면접은 다음날 오전. 이 문제로 어젯밤 와이프와 함께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Y사와 U사를 차버린 상황에 다시 모험을 하기 위해 V사 2차 면접에서까지 모험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2차 면접때 출근 시점을 어버버 얼버무리는 리스크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Z사의 2차 면접에는 개발 포트폴리오도 따로 준비해야 했기에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V사에 올인하기로 했다.
V사 2차 면접. 오늘 오전이었다. 사장님과 임원 한 분 해서 2대1 면접. 회사까지의 출근 시간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되었다. 사장님의 복장과 어투에서 벌써 야전 타입인 게 느껴졌다. 최대한 진지하게 면접에 임했고, 여느 회사와는 다르게 '대화'한다는 느낌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갔다. 어떤 회사가 좋냐고 하셔서 '회사는 성장해야 한다. 일 늘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버티고 있는 회사, 사람 더 쓰는 걸 아까워하는 회사는 매력이 없다. 야망이 있는 회사가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장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대학 졸업 후 있었던, 군데군데 깊게 패인 경력 공백기에 있었던 이런저런 개발 외 경험들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했다. 개발에 관련된 경력이 아니면 모두 빼놓고 쓴 이력서였는데,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 넓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면 전부 개발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해주셨다. 번번한 학벌 없이 가진 거라곤 알량한 몇 가지 경험들 뿐 - 늦은 나이에 겨우겨우 쌓은 3년차 경력인데 - 이력서에 기재한 희망 연봉에서 내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종류의 경험을 다 더해서 연봉을 높여주셨다. 그간 살아온 인생 굴곡까지 다 돈으로 환산해서 사주겠다는 의미였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원한다고도 하셨다. 이건 그냥 게임 끝이었다. 다른 회사들 아무데도 더 볼 필요가 없게 돼버린 것이다. 오케이 사인만 내주신다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겠다고 했고, 오후에 최종 합격 연락이 왔다. 월요일 부터 출근이다. 어제 방문했던 Z사의 2차 면접은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며 정중하게 취소했다.
8월 부터 11월 오늘까지. 3개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지금도 정신이 없다. 바로 어제가 택배 상하차 하던 날 같기도 하고. 죽어라고 날 까내리던 B사 사장님의 얼굴을 봤던 게 몇 년 전 같기도 하고. '밤 잘새요?'라는 멘트가 귓가에 울리기도 하고. 추운 손을 비비며 G사의 재활용 분리수거 박스를 비우던 게 오늘 점심 때 같기도 하고. 1월에 다닌 회사는 대체 무슨 용기로 뛰쳐나왔으며, 9월에 다닌 회사는 또 무슨 용기로 뛰쳐나왔을까. 간이 배밖으로 나왔는지 - 그깟(?) 야근/출장이 뭐라고 오라는 회사에 안 갔을까.
모르겠다. 인생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봤던 글귀처럼 바닥에서 시작하는 인생이란 그저 무지를 경계하면서 한 계단씩 올라가면 될 뿐인 걸까. 그래도 잠시나마 스스로를 좀 칭찬해 주고 싶다. 잘했다. 이공계 업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판단을 비교적 빠르게 잘 했다. 결혼 참 잘했고, 경력도 잘 쌓았다. 대학 잘 나오고 직장 잘 풀린 사람들에겐 참 보잘것 없는 경력이겠지만, 나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경험이고 성장이었다. 과감할 땐 과감했고, 돈이 필요할 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싸게 팔지 않으려 끝까지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다. 식상한 멘트겠지만, 나는 오늘 무언가를 성취한 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지난주에 구해줬던 쥐가 은혜를 갚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어쩔 수 없이 한반도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그런가 낭만적이고 고전적인 생각도 하게 되는 듯하다. 검색어 유입 상위권에 항상 꿈 해몽이나 조상님 묘 이장이 뜨는 블로그의 주인 답게 말이다.